#송년을 함께하는 책과 그림
벌써 한 해가 다 지나고 며칠 남지 않았다. 유독 따뜻한 날씨 탓에 실감이 나지 않지만 거리 풍경을 보니 연말이 온 것이 분명하다. 백화점 앞에는 대형 트리가 들어섰고 가로수에는 조명이 걸렸다. 그 앞을 지나는 사람들의 대화 내용도 가만히 들어보면 송년과 신년을 축복하는 말들이다.
새 이후에 해양 생물, 식물 등을 그리고 ‘한 권의 책 한 점의 그림’이라는 연작을 발표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작품은 새, 해양 생물, 식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책을 그리는 것이 됐다. 책 안의 방대한 정보량을 하나의 작품으로 남기는 과정은 도전이었다. 하지만 어떤 대상을 만나도 그려낼 수 있다는 용기를 내는 원천이기도 했다.
그림을 그릴수록 더 나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처음에는 점점 더 두꺼운 책을 그리는 시도를 했다. 그리고 이 시도는 책 속 수많은 개체가 담긴 풍경을 만드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물고기 도감을 펼친 채 가장 멀리 있는 물고기를 그리고 물을 한 겹 바르고, 그 앞에 있는 물고기를 그리고 물을 한 겹 바르는 과정을 반복했다. 나열하고 배열하듯 그리던 그림이 중첩하고 원근감을 갖기 시작했다. 이렇게 그려낸 허수영의 그림은 신비롭고 환상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원근법을 포함한 회화의 기본을 넘어서지 않으며 아우라와 힘을 가진다.
#일 년
허수영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일 년’이라고 부르는 연작이다. 이 연작은 2012년 광주에 위치한 양산동 창작스튜디오에서 시작했다. 당시 허수영은 미술 기관들이 마련한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해 작업실을 사용했다. 프로그램은 보통 1년 단위로 운영되었고 작가는 그때마다 이사를 했다. 책은 언제든 그릴 수 있으니 머무는 기간 동안 머무는 장소에서만 할 수 있는 작업을 떠올렸다. 그것이 그 시간과 장소, 그리고 그 안에 있던 자신에게 의미를 남길 것 같았다.
작업실 주변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작업실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사생한 것이 처음이었다. 추운 날씨에 앙상하게 가지만 있던 나무를 그렸다. 그 위에 연두색 싹이 올라오면 그것을 그렸다. 여름에는 싹 위에 무성한 푸른 잎을 그렸다. 가을에는 푸른 잎 위에 붉은 단풍을 그렸다. 겨울에는 붉은 단풍을 덮은 눈을 그렸다. 계절이 변할 때마다 장면은 더해졌다. 이렇게 사계절이 한 화면에 누적하면 비로소 한 작품이 끝났다.
‘청춘의 문장들’을 읽고 떠올린 ‘산양리10’(2014)도 이 연작 중 하나다. 경기도 이천 산양리에 위치한 레지던시에서 지내며 그린 그림이다. 화면 앞쪽에 피어 있는 들꽃의 노란색이 시선을 잡는다. 하지만 그 시선을 붙잡아 두는 것은 그 뒤의 풍경들이다. 봄의 풍경 사이로 보이는 앙상한 가지에서 느껴지는 다른 계절의 공기. 그 모든 것을 덮었던 듯 남은 눈의 흔적. 공기와 흔적은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이 작품은 몇 년 전 열린 작가의 개인전 전시장 입구에 걸려 있었다. 처음에는 돌이 흩어져 있는 풍경에서 시작했다는 작가의 설명을 들었다. 3미터에 이르는 대형 화면은 한 겹의 물감을 칠하는 것에도 시간과 체력이 필요하다. 그는 이 화면 위에 몇 겹의 붓질을 하며 얼마나 긴 시간을 보냈을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성심을 다한 작품은 시간성과 공간성을 하나의 캔버스 위에 오롯이 담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두고 다음과 같이 썼다. “… 공존할 수 없는 상황들이 중첩된 풍경과 서로 다른 시간들이 혼재된 순간이 펼쳐진다. 기억들이 모여 추억이 되듯이, 재현들이 모여 표현이 되듯이, 정지된 공간의 순간들을 모아 흐르는 시간의 모호한 무늬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작가는 이 무렵 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최하는 리서치트립에 선정되어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났다. 케냐, 탄자니아 등 몇몇 국가를 방문했다. 마다가스카르에서 밤하늘을 가득 채운 별을 보며 존재에 관해 다시 생각했다. 킬리만자로에 오르며 고도에 따라 변하는 풍경을 보았고 계절을 시간과 맞물려 단언할 수 없다는 생각도 했다. 이후 한국에서의 삶에서도 전에 없던 경험과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그것들은 최근의 작업에 드러나며 그의 작품 세계를 더 깊게 하고 있다.
#태도가 담긴 작품, 태도가 담긴 삶
허수영의 작업 과정은 때로 사진으로 남는다. 작가가 찍은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 지인이 작업실에 왔다가 찍은 사진이다. 사진을 찬찬히 살펴보면 하나의 작품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 있다. 처음에는 담벼락 너머 집이 보이는 풍경에서 시작했다가 나무 덩굴의 모습으로 남은 작품도 있다. 그림 잘 그리는 것으로 유명하니 물감으로 덮인 지난 풍경들이 내 눈에는 마냥 아깝다. 그래도 작가가 그것을 사진으로 남기지 않는 이유는 단순하다. 지금 그리는 그림에 방해가 되는 것 같아서다.
허수영은 봄, 여름, 가을을 거치고 나서야 그려낸 겨울에서 진짜 겨울의 모습을 본다고 말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허수영의 작품은 시간과 장소를 그린 것이지만 결국은 허수영이라는 작가의 태도를 담고 있는 것 같다. 그가 새 도감을 그린 뒤 새를 그린 것이 아니라 책을 그린 것이라고 말했듯 말이다.
허수영의 그림을 보며 김연수 책을 읽고 했던 생각을 되새긴다.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다. 그렇게 받아들이니 올 한 해가 지나가는 것이 아쉽기보다 감사하다. 그렇게 쌓인 시간이 내가 가질 어떤 태도의 바탕이 되기를 바라며. 수고했던 지난 일 년이라는 시간에 격려의 말을 전하고 싶다.
김한들 큐레이터, 국민대 미술관·박물관학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