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가족 여행을 이렇게 망쳤다는 것이 너무 슬퍼요.”
허모(39·여)씨는 다음달 필리핀 세부로 가족여행을 갈 생각에 들떠있었다. 시아버지 칠순 기념으로 3대 10명의 대가족이 함께 하는 여행이었다. 정보를 얻기 위해 세부 여행 관련 유명 온라인 카페인 A 카페를 둘러보던 허씨는 카페의 협력업체로 홍보 중인 리조트 예약 대행업체 ‘에브리필’의 글을 발견했다. 세부에 거주하는 한인이 운영하는 업체였다. 50만명이 가입한 A카페에서 홍보하는 업체였기에 허씨는 아무런 의심 없이 해당 업체를 통해 리조트를 예약하고 이달 초 400여만원을 입금했다.
출국 날짜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허씨는 우연히 A카페에 들어갔다가 놀라운 글을 읽었다. 에브리필이 폐업했다는 글이었다. 부랴부랴 리조트 측에 알아봤지만 예약된 내역은 없었다. 허씨는 “가족 여행을 망칠 수 없어 다시 숙소를 잡았지만 너무 화가난다. 돈도 아깝지만 여행을 망친 것 같다”며 “유명 카페에서 보증하는 느낌이었고 오래 운영한 업체라 믿었는데 배신 당한 기분”이라고 말했다.
필리핀 세부·보라카이 숙소 예약 업체인 에브리필이 16일 돌연 폐업했다. 세부 숙박 예약 대행 업체 중 꽤 큰 규모에 속하는 에브리필이 폐업하면서 여행을 준비하던 사람들의 피해가 잇따르고 있다.
17일 현재 네이버에 개설된 ‘에브리필 피해자 모임’ 카페에는 450여명이 가입했다. 17일 오후 1시 기준으로 카페에 올라온 피해금액은 8000만원이다. 아직 폐업 사실을 모르고 있는 피해자들도 있어 피해금액은 억대로 불어날 것으로 보인다.
에브리필은 한국인 송모씨가 2014년 7월 창업한 필리핀 숙소 예약 대행업체로, 세부와 보라카이의 리조트 예약을 대행해왔다. 에브리필의 인터넷 카페 멤버는 1만8000명에 달한다. 에브리필의 대표 송모씨는 15일까지도 예약 안내를 진행하고 입금도 받았지만, 16일 카페에 “폐업결정을 하게 됐습니다”란 글을 남겼다. 송씨는 이 글을 통해 “여행피해를 입은 고객께 개별적인 환불을 약속 드리겠다”고 밝혔지만 피해자들의 메일도 읽지 않는 등 사실상 연락이 두절된 상태다.
피해자 모임 카페에 올라온 피해 사례를 종합한 결과 송씨는 고객들로부터 예약금을 받은 뒤 실제로는 리조트에 예약을 하지 않고 돈을 빼돌린 것으로 보인다. 예약 고객들이 대부분 몇달 뒤 일정을 예약한다는 점을 노린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일부 고객에게는 조작된 바우처를 주거나, 리조트에 돈을 지불하고 예약을 완료했다가 임의로 취소하고 돈을 빼돌린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자들은 적게는 몇십만원부터 많게는 400여만원까지 피해를 입었다. 어머니 칠순 기념으로 가족 여행을 떠나려고 했던 김모(42)씨는 이달 초 A카페를 통해 에브리필에 300여만원을 입금했지만 리조트가 예약되지 않았다. 김씨는 “예약 후 일주일이 지나도 바우처를 주지 않아 요청했더니 1주일만 더 기다려달라고 해서 기다리던 중이었다”며 “가족들에게는 아직 피해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속상해하실 것 같아 비밀로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어 “가족이 다같이 가는 첫 여행인데 너무 속상하다”며 “신뢰가 깨져서 다시 숙소 예약하는 것도 두렵다”고 토로했다.
이달 말 결혼 10주년 기념 여행을 떠날 예정이었던 김모(37·여)씨도 최근 에브리필에 120만원 가량을 입금했다. 김씨는 에브리필로부터 숙소 예약이 완료됐다는 바우처도 받았지만 리조트에 확인 결과 조작된 바우처였다. 임신 20주차인 김씨는 “속상했지만 첫째와 둘째 아이의 기대가 커 급히 다른 숙소를 예약했다”며 “폐업 전날까지도 카카오톡으로 연락을 주고 받았는데 지금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모(37)씨는 폐업 하루 전인 15일 송씨와 연락을 주고 받고 150만원을 입금했다. 정씨는 “일년에 한번 가족들이 함께 가는 여행을 망쳐놨다. 여행 기분이 안나서 수수료를 물고 항공편도 다 취소했다”고 말했다.
문제는 피해자 대부분이 A카페 등 세부 여행 관련 카페를 통해 에브리필과 접촉했다는 것이다. 세부 여행 관련 유명 카페인 A카페는 ‘숙소/리조트 예약’이라는 게시판을 운영하는데, 해당 게시판에는 A카페가 승인한 숙소 예약 대행 업체들이 홍보글을 올린다. 이 과정에서 A카페는 해당 업체들로부터 매달 10만∼30만원 가량의 광고료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달만 숙소 예약 게시판에 30여개의 홍보글이 올라와 있다.
지난달에 올라온 글은 60여개다. 이밖에 △호핑전문업체 △다이빙전문업체 △여행사/데이투어 △보홀여행전문업체 △레스토랑/요리/카페 △마사지샵 △뷰티샵 △기타/팬션/액티비티 △쇼핑/구매대행 △포토스튜디오/스냅 △여행자보험/카드 △공항주차대행/주차장 △와이파이/고프로랜탈/유심/로밍 게시판에서도 각각 업체들이 홍보글을 올리고 있다. 한달에 수백건이 넘는 홍보글이 A카페의 승인을 거쳐 올라오는 것이다. 현지 업체 관계자는 “A카페 운영진들이 홍보비 수입으로 월 2000만∼3000만원은 받을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피해자들은 A카페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입장이다. A카페에서 에브리필의 홍보 글을 보고 예약한 이모(38)씨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카페인만큼 아무 업체나 올려주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며 “돈을 받고 게시를 허락하는 공간이라면 적어도 믿을 수 있는 업체인지 정도는 걸렀어야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A카페 관계자는 “카페 내 홍보업체와는 이메일/쪽지로만 대화를 진행하고 있다”며 “진행사항은 변호사 상담 등을 받아보고 단체소송 등 카페에서 취할 수 있는 조치를 알아보겠다”고 밝혔다.
피해자들은 개별적으로 경찰에 신고하는 한편 단체소송도 준비 중이다. 경찰은 해당 사건에 대한 신고를 접수하고 수사에 착수할 방침이다.
김유나 기자 yoo@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