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이 ‘기획팀장’인 경우가 있다면 이현정 LG아트센터 기획팀장이 그렇다. 지난해 14편, 올해 10편의 공연을 기획했다. “우리나라 공연 문화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 LG아트센터가 개관한 2000년부터 계속 무대를 기획해왔다. 실제 인연은 더 오래됐다. “1994년 기본설계, 96년 실시설계가 이뤄진 후 김의준 초대 대표가 제일 먼저 LG아트센터에 오시고 제가 두 번째로 합류했어요. 그게 96년 12월이어서 97년부터 3년 준비해서 2000년 개관한 거죠.”
애초 이 팀장의 첫 직장은 금융투자사였다. 그런데 공연이 너무 좋아 박봉을 감내하며 작은 클래식 기획사로 옮겨 일하다 LG아트센터에서 일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좋은 공연을 골라 섭외하고, 무사히 마지막 무대가 끝날 때까지 모든 일을 챙겨야 하는 공연장 기획팀장으로 20년을 일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수익이 아닌 공익을 위해 운영되는 비영리문화법인에서 그만큼 오랫동안 소신을 가지고 좋은 작품을 골라 관객에게 소개한다는 건 공연기획자로선 최고의 기회다. 지난 16일 LG아트센터에서 열린 세계일보와 인터뷰에서 이 팀장은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기획자가 제일 보람을 얻는 게 좋은 공연을 관객에게 소개할 때인데 그 기회를 다른 간섭없이 팀원과 같이 만들어 올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며 “김 초대 대표가 15년간 그러한 기반을 만들어주셨고 이후 후임 대표님들이 프로그램 기조와 명성, 신뢰를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응원해주셨는데 무엇보다 관객 호응과 지지 덕분에 이를 지켜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LG아트센터가 무대에 올리는 작품은 ‘믿고 볼 수 있는 작품’으로 신뢰를 받는다. 공연을 묶어 파는 패키지 프로그램은 매년 판매 첫날 10% 정도나 팔리는데 올해도 마찬가지다.
특히 연극 분야에선 세계 공연계를 열심히 발품 팔아 발굴한 참신한 극단이나 명성 높아 내한 무대에 모시기 힘든 거장 작품을 소개하는 것으로 정평 나 있다. 지난해 격찬을 받은 이보 반 호브의 여섯 시간짜리 대작 ‘로마비극’이나 캐나다 천재 연출가·배우 로베르 르빠주의 ‘887’이 대표적 사례다. 이 팀장은 “‘로마비극’은 2008년 처음 알게 된 후 계속 무대에 올리고 싶었던 작품이다. 원래 개관 15주년 기념 작품으로 2015년 공연하고 싶었으나 규모가 너무 커서 예산에 무리가 생겨 못했다. 지난해 적자가 예상되는데도 할 수 있었던 건 수년간 재무구조가 안정화된 덕분이었다. 최근 재정에 신경을 쓰다 보니 ‘기획이 평이해진 것 아닌가’라는 반성이 있어서 다시 ‘모험을 해보자. 도전적 작품으로 관객과 소통하자’는 취지에서 공연이 추진됐다”고 설명했다.
이보 반 호브 측 역시 워낙 대작인 이 작품을 초연 때부터 12여 년째 공연하는데 단원들이 육체적 한계를 느껴 ‘로마비극’공연을 삼가온 상태. 그러나 2012년 ‘오프닝 나이트’, 2017년 ‘파운틴 헤드’ 한국 초연으로 아시아권에 ‘이보 반 호브’를 널리 알린 LG아트센터에 대한 특별한 신뢰 때문에 로마비극 서울 공연에 나섰다. 그 결과 중국, 일본, 싱가폴 주요 극장 관계자들이 이번 공연을 직접 보고 매료된 나머지 ‘로마비극’ 공연 요청이 다시 이보 반 호브측에 쇄도하고 있다고 한다.
이 팀장은 “‘로마비극’은 사실 티켓 한장 당 15만원 정도 받아야 제작비가 충당되는 공연이었는데 연극 공연을 그렇게 받을 수는 없어서 실제로는 정가 9만원에 온갖 할인까지 적용했다. 전석 매진이어도 굉장히 큰 손해를 봐야 하는 공연이어서 기획 마지막 단계까지 ‘왜 이 공연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던져졌다”며 “그런데도 이 공연은 이제까지 우리가 공연하면서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든 관습과 관례를 다 깨는 공연이었다. 휴식 없이 여섯 시간을 내리 하는 것이나 객석 안에서 먹고 마시고 사진도 찍고, 심지어 소셜미디어에 실시간으로 사진과 감상을 올리게 하고, 배우들이 연기하는 무대로 올라가고 자유롭게 공연 중 이동해도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연 자체가 너무 집중력있게 흘러가는데다 작품 자체의 해석이나 연기도 훌륭했다. 여러가지 면에서 공연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관람해야 하는가에 대해 다양한 생각들을 하게 만든 작품이었기에 공연이 끝난 다음에도 오랫동안 기억에서 잊히지 않았다. 당연히 관객들의 반응도 뜨거워서 큰 보람이 있었다”고 말했다.
좋은 공연을 기획하는 비결에 대해 이 팀장은 “우선 최대한 리서치를 많이 한다”고 말했다. “리서치하는 좋은 방법이 세계 각국 해외문화원 담당자와 계속 소통하면서 좋은 아티스트를 소개해달라고 부탁합니다. 또 세계 곳곳의 페스티벌이나 유수 극장 프로그램을 보면 ‘어떤 아티스트가 각광 받는구나’하는 흐름이 잡혀요. 그래서 좀 더 알아보고 관련 비디오를 찾아보기도 하죠.”
리서치는 좋은 공연 발굴의 시작일 뿐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공연 후보군에 오른 작품은 직접 본 이들의 관람평이나 현지 리뷰 등을 통해 다시 걸러지며 필요할 때는 LG아트센터 측에서 직접 현지로 답사를 나간다. 그 후에는 기술적 요구사항과 재정 문제를 따진다. 이미 공연이 확정된 다른 작품과 성격이 겹치면 다음 기회로 미뤄야 할 수도 있다. 작품 규모가 너무 크거나 너무 작아도 안 되고 예산이나 공연 일정이 안 맞을 수도 있다. 실제 공연료보다 큰 부담은 항공료와 화물 운송료다. 로마비극의 경우 출연·제작진이 40여명 이상 내한했다. 올해 공연 예정인 보리스 에이프만 발레단은 50∼60명이 올 예정이다. 이 팀장은 “1월에 염두에 뒀던 내년 공연 리스트가 연말에 가보면 30% 정도밖에 안 남는 편”이라고 말했다.
이 팀장은 “LG아트센터는 좋은 공연으로 평판을 쌓아왔기 때문에 해를 거듭할수록 ‘좋은 기획을 해야 한다’는 부담이 커진다. 포트폴리오 다양화에 목표를 두고 있다”면서도 “결국은 예술성이 최고 목표다. 대중적인 공연이더라도 예술성을 갖춰야 LG아트센터에 어울린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간 쌓아 올린 명성은 새 공연 섭외의 든든한 받침돌이다. “이젠 해외 아티스트에게 LG아트센터를, 심지어 아시아·한국 공연 시장을 설명하지 않아도 그들이 너무 잘 알고 있어요. 유럽 현지에서도 ‘OOO이 서울 공연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더라’는 소문이 금방 나거든요. 굉장히 좋은 단체가 먼저 연락해오는 경우도 있고, 또 우리가 좋은 아티스트 작품을 계속 소개하면서 국내 관객이 그 작가를 알고 좋아하게 됩니다. 그래서 기획이 쉬워진 면도 있는데 반대로 예전에는 이런 시도만으로도 큰 호응을 얻었지만 이제는 관객 눈높이가 높아져서 우리가 해야 하는 고민의 깊이가 달라졌고 더 조심스러워지고 부담감도 커졌습니다.”
가장 힘들 때는 역시 한 해 공연 계획을 최종 결정하는 순간이다. 내부 논의에서 모두가 동의하는 공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이 팀장은 “가장 힘든 건 프로그램 결정이다. 당연히 내부 논의할 때 부정적 시각을 가진 구성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면 제가 확신을 가지고 설득해야 하는데 그런 판단을 하는 과정이 제일 힘들다”고 말했다.
수년 치 일정을 미리 챙겨야 하는 직업 특성상 이 팀장은 이미 2022년 마곡 새 보금자리에서 열리는 LG아트센터의 청사진을 구상 중이다. “역삼동에선 2021년 상반기까지만 공연하고 2022년부터는 마곡에서 관객을 만나게 됩니다. 마곡LG아트센터는 1300석 규모의 대공연장에 블랙박스형 극장이 따로 들어서게 되는 만큼보다 다양한 제작이 가능합니다. 그간 양정웅, 고선웅, 서재형, 이자람 등의 국내 예술가와 여러 차례 공연을 만들어 세계 시장에 소개하는 역할도 꾸준히 해왔는데 마곡에선 더욱 활발히 국내 아티스트 무대를 만들려는 계획을 고민 중입니다. LG아트센터가 1000석 규모의 민간극장이나 ‘초대권 없는 극장’, ‘시즌제 도입’ 등으로 예매문화 정착 등 국내 공연문화에 많은 변화를 이끌어왔는데 앞으로도 소소하게 옳다고 생각하는 일들로 공연문화를 발전시켜나가고 싶습니다. ”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