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 후보로 올라간 한국 영화는 봉준호의 ‘기생충’만이 아니다. 세월호 침몰사고를 다룬 이승준 감독의 단편 다큐멘터리 ‘부재의 기억’도 후보에 올랐다. 이제 세월호 참사는 6년이 다 되어가도 여전히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사건이고 사고 당시에는 외신을 많이 탔지만, 많은 외국인들에게는 여전히 낯선 사건이다.
대형 선박의 침몰은 전 세계적으로 종종 일어나는 사고이지만, 세월호의 사고가 특별한 것은 그것이 한국사회의 단면, 특히 당시 정권의 문제점을 낱낱이 드러낸 사건이기 때문이다. 세월호 사고를 알고 있는 외국인들도 그 어처구니없는 내막과 그 사고가 내포한 한국 정치와의 연관성은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부재의 기억’은 영화예술이 사회문제를 다시 한 번 지적하고 알리는 역할을 해주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나폴레옹의 혁명이 휩쓸고 간 1814년, 프랑스에 부르봉 왕조의 왕정이 복귀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권이 그렇듯, 왕좌에 앉은 루이 18세는 혁명파 사람들을 공직에서 밀어내고 왕정을 지지했던 사람들을 앉히는 작업을 했다.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 충성했던 유 듀로와 드 쇼마레이를 메두사라는 배의 선장으로 임명했는데, 그 배는 1816년 프랑스가 영국으로부터 아프리카 세네갈의 식민지를 인계받는 과정에서 프랑스 식민지 총독을 포함한 400여명의 승객을 실어나르는 데 동원된다.
문제는 당시만 해도 프랑스에는 아프리카로 가는 항해지도가 지나치게 오래된 버전밖에 없었고, 쇼마레이 선장은 배에 타본 지 20년이 넘는 데다가 한 번도 배의 선장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메두사호에 탄 승객들은 몰랐지만 프랑스에서 아프리카 서북부에 있는 세네갈까지 가는 길은 사실상 모험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아프리카의 서부 해안선을 따라 내려가는 항로는 긴 모래톱 때문에 아주 조심하지 않으면 배가 좌초될 위험이 컸는데, 경험이 전무한 선장은 자신의 일을 (역시 경험이 부족한) 부하에게 몰래 떠넘기고 손을 떼고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배가 좌초하게 되었다. 선장과 선원들은 배를 바로 잡아보려고 시도했지만, 목선인 메두사호의 바닥에는 구멍이 났고 배는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무선통신도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구조요청도 할 수 없고, 이대로는 죽을 것임이 분명하다는 판단하에 배에 있던 작은 구명보트 몇 대에 나눠 타고 탈출하기로 했다.
물론 구명보트의 숫자는 턱없이 부족했지만, 배가 빠르게 가라앉지는 않았기 때문에 50km 떨어져 있는 해안까지 구명보트로 두 세번에 나눠서 승객을 실어나를 수 있었다. 하지만 선장은 그렇게 하는 대신 폭 7m, 길이 20m의 거대한 뗏목을 만들어서 나머지 승객 150명을 모두 옮겨싣고 구명보트가 그 뗏목을 끌고 해안으로 가겠다는 어처구니없는 계획을 세운다.
뗏목은 완성되자마자 표면이 물에 잠겼을 만큼 문제가 있었지만 선장은 강행했고 결국 150명을 태웠지만, 이 과정에서 실수로 태우지 못한 승객 10여명이 좌초된 배에 남겨졌다. 그 뗏목을 끌고 몇 km를 채 가지 못해 더 이상 끌고 가는 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선장과 선원들은 뗏목을 끌던 밧줄을 잘라버리고 자기들끼리만 해안으로 가기로 했다. 남겨진 사람들은 죽겠지만 자신들은 살아야겠다는 어처구니없는 결정이었다. 그들은 무사히 해안에 도착했지만 뗏목에 남은 사람들을 구조하러 가는 대신 육로를 통해 목적지로 떠났다.
뗏목은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뜨거운 바다 한가운데 남겨진 150명은 이동할 방법도 없이 차례차례 죽어가기 시작했다. 뗏목 위에 조금 있던 물과 비스킷은 금방 바닥이 났고, 탈진한 사람들은 뗏목 위에서 숨을 거두기도 했고, 고통스러워 물에 뛰어들어 죽기도 했다. 그렇게 뗏목에 탔던 150명은 4일 만에 67명으로 줄어들었고, 그다음부터 배 위에서 죽은 사람들의 시신을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게 되자 부상당한 사람이나 죽어가는 사람들을 뗏목 밖으로 밀어내버리는 일까지 일어났다.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은 그렇게 15일이 지난 후 뗏목에 탔던 150명이 15명으로 줄어든 시점을 묘사하고 있다. 화면에는 보이지 않지만 메두사호와 함께 프랑스에서 출발한 영국선박 아르고가 지나는 것을 보고 도와 달라고 외치는 장면이다. 아르고는 그들을 보지 못하고 지나쳤지만, 극적으로 뗏목을 다시 발견하고 그들을 구조했다. 아르고 선원들은 뗏목 위에 있던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의 시신을 잘라서 널어놓고 말리는 장면과 그들에게 일어난 일에 충격을 받았고, 그 소식은 프랑스로 전해졌지만, 부르봉 왕실은 그 이 야기가 나라에 퍼지지 않도록 막았다.
하지만 생존자의 증언은 책으로 출간되었고, 그 이야기를 듣고 분노한 20대의 화가 제리코는 이를 가로 7m, 세로 4.9m의 거대한 화폭에 옮기기로 했다. 당시의 상황을 최대한 생생하게 기록하기 위해 생존자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들었고, 바다에 나가서 파도가 부서질 때 어떤 빛을 띠는지 연구했을 뿐만 아니라, 부랑자의 시신을 가져다가 지붕 위에 올려놓고 햇볕 아래에서 사람의 시신이 어떻게 부패하는지를 기록에 남겨서 뗏목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살려냈다.
‘메두사호의 뗏목’은 1819년 파리 살로에 출품되어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뗏목에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보이지 않는) 배를 향해 손을 흔드는 인물을 흑인으로 그려넣은 것이나, 돌조각처럼 차가운 그림을 그리던 당시 신고전주의를 버리고 감정이 휘몰아치는 격정적인 묘사는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당시 주류 화가들은 제리코가 이 그림으로 선보인 낭만주의를 “시체더미 그림”이라고 크게 비난했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사실성과 날것의 감성은 당시 젊은 화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특히 같은 세대의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는 제리코의 화풍을 이어받아 프랑스에 낭만주의를 꽃피우게 된다.
28세에 이런 대작을 남긴 제리코는 아쉽게도 32세의 나이에 요절하지만 그의 죽음 직후 루브르미술관은 ‘메두사호의 뗏목’을 구입했고, 아직도 루브르미술관에 자랑스럽게 전시되어 있다.
박상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