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부한 영양·고소한 버터향… ‘불로장생 명약’ [안젤라의 푸드트립]

가평잣 / 잣나무 씨앗… 예로부터 ‘한국산 으뜸’ 인정 / 윤기 흐르고 흉터가 없는 매끈한 것 골라야 / 가평잣막걸리에 오리 더덕구이 환상 궁합
뽀얀 피부에 달걀형 동양 여자의 얼굴을 닮은 잣. 어릴 땐 느끼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어른이 되니 버터 스카치 사탕처럼 미끈하고, 고소한 버터 맛이 느껴진다. 생각해 보니 잣은 명절에 수정과나 식혜를 먹을 때 있는 그대로 동동 띄워 먹거나 산적이나 떡갈비 위에 잣가루를 부셔 먹기만 해봤지 잣이 대체 무슨 열매이고, 어떤 잣이 좋은지 생각해 볼 기회가 없었다. 소양강과 토속음식을 맛보며 즐기는 안젤라의 푸드트립 마흔세 번째 여행은 가평의 잣이다.

#버터 스카치향이 나는 불로장생 향토음식, 잣

잣은 잣나무의 씨앗이다. 영어로는 파인넛츠(Pine Nuts), 이탈리아어로는 피뇰리(Pignoli)로 불린다. 신라시대 때 한국산 잣이 고급품으로 알려지면서 중국에서는 신라송(新羅松)으로 불렀고, 일본에서는 조선 소나무라는 뜻인 ‘조센마쓰(チョウセンマツ)’라고 불리며 한국 잣의 우수성을 오래전부터 인정받아 왔다.



잣은 솔방울처럼 생긴 커다란 송이 안에 노란빛이 도는 하얀 씨알로, 얇은 껍질 안에 감싸져 있다. 잣 송이는 나무 꼭대기에만 달려 있기 때문에 직접 올라가서 따기 어렵기도 하고 위험하다. 그래서 긴 장대를 가지고 잣 송이들을 쳐서 떨어뜨려 수확하기도 하는데, 떨어져 맞은 송이에 다칠 수 있어 헬멧을 쓰고 작업할 정도로 극한 직업 중 하나로 속한다. 수확 과정이 어려운 만큼 가격이 비싸지만, 잣을 대체할 수 있는 열매가 없기 때문에 잣의 매력에 빠진 사람들은 쉽게 잣을 포기하지 않는다.

터키에서는 잣을 ‘소나무에서 나는 땅콩’이라고 표현을 하는데, 그 고소함은 한국의 잣과 비교할 수 없다. 한국의 잣은 ‘소나무에서 나는 버터스카치 캔디’로 부를 정도로 미끈하고, 고소한 버터향과 은은한 단맛이 일품이다.

잣 생산 지역으로 유명한 곳은 가평과 홍천. 잣은 황잣과 백잣으로 구분이 되는데 우리가 보통 접하는 잣은 백잣이다.

황잣은 자연상태의 피잣(껍질이 있는 잣)을 깨서 먼지만 털어낸 뒤 건조한 잣이고, 백잣은 따뜻한 물에 피잣을 불려 껍질을 제거해 건조한 잣을 말한다.

영양분만 비교했을 때는 사실 껍질째 먹는 황잣이 자연상태에 더 가깝기 때문에 더 좋아 백미보다 현미나 통곡물을 찾아먹는 것처럼 최근에는 황잣의 가치가 높아지고 있다. 맛있는 잣을 먹기 위해서는 윤기가 흐르고, 흉터가 없는 매끈한 잣을 골라야 하고, 도정하자마자 먹는 것이 가장 좋다. 잣은 식물성 기름이 많기 때문에 도정한 지 너무 오래된 잣을 먹으면 기름 쩐내가 날 수 있고 고소함이 덜하다.

#한국의 잣 세계로 알리는 막걸리

막걸리를 좋아하시는 부모님은 최근에 나오는 묵직한 프리미엄 막걸리나 과일향이 나는 특이한 막걸리보다는 깔끔하고 청량감이 있는 가평 잣 막걸리를 좋다고 하신다. 가평에 있는 양조장 ㈜우리술을 찾아 어떤 방식으로 만드는지 알아보았다.

이곳은 1920년부터 가평에서 막걸리를 빚어온 곳으로, 맑은 물로 유명한 가평의 지하 250m 천연 암반수를 사용하고, 계약 재배를 통해 100% 국내산 쌀만 사용하고 있다. 우리술 박성기 대표는 잣, 알밤, 옥수수, 고구마, 귤 등 우리나라에서 나는 자연 원물을 막걸리에 담기 위해 노력해 왔고, 막걸리만큼 우리나라의 맛을 해외에 알릴 수 있는 식품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잣이나 밤, 옥수수, 고구마 등의 과일은 유통기한이 짧고 생과일이기 때문에 수출하는 데 제한도 많아 본연의 맛을 내기 어렵지만 캔막걸리를 통해 그 맛을 전 세계에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잣 막걸리는 잣 페이스트나 잣기름, 잣 착즙액을 사용하지 않고, 가평의 1등급 잣을 원물 그대로 으깨서 넣어 더 고소하고 깔끔한 맛을 자랑한다. 현재 우리술은 한국을 넘어 베트남, 네팔, 인도 그리고 미국에 수출하고 있으며 2019년에는 매출 100억원을 달성했다.

#더덕 오리구이와 찰떡궁합

양조장에서 약 10분 정도 떨어진 소양강 식당으로 향했다. 이름처럼 식당 뒤에 소양강이 흐른다. 환하게 맞이해 주는 사장님의 안내를 받고 창가 자리에 앉았다.

아직 겨울이라 야외에서 식사를 하기 어렵지만 조금만 따뜻해지면 테라스에서 불을 지펴놓고 더덕 오리고기 구이를 즐겨먹는 사람들로 가득찬다고 한다. 5~6가지의 정갈한 반찬들을 시작으로 큼지막하게 썬 마늘과 더덕, 오리고기가 나온다. 주물럭처럼 빨간양념에 버무려져 나왔는데 자극적이거나 맵지 않았다.

보통 같으면 소맥 한잔을 함께했을 텐데 가평에 왔으니 가평 잣 막걸리를 주문했다. 하지만 이게 웬걸! 탄산이 살아 있는 막걸리의 청량감과 잣의 고소함이 한데 어울려 입에 남아 있는 매콤한 양념은 제거하고, 오리고기의 고소한 질감을 즐기는 데 충분했다.

소주와 먹었으면 입에 청량감을 주지 못했을 것이고, 맥주와 먹었으면 싱겁기만 했을 것이지만, 막걸리는 음식의 간과 질감을 살려주는 데 좋은 궁합을 보여주었다. (관련 영상 https://tv.naver.com/v/12081469)

김유경 푸드디렉터 foodie.angela@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