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삼청로 학고재에서 전시 중인 ‘느린 풍경 - 덕도길’이다. 지난달 22일 개막한 작가의 개인전 ‘김선두’에는 이 작품을 비롯해 느림의 미학을 느낄 만한 작품 19점도 함께 걸렸다. 그는 “젊은 시절 유명 화가가 되겠다고 바쁘게 속도를 내며 살다 보니 나도 주위 사람들도 피폐해졌다”며 “내 삶의 속도도 줄이면 더 인간적이고 여유 있는 삶이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선두는 자신의 색을 한국의 묵은지와 고추장에 비유한다. 맵지만 겉절이처럼 화끈거리지 않는 빛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도 두껍게 중첩한 배경의 붉은빛과 달리 매우 옅은 농담으로 그렸다. 수채화처럼 가볍게 표현해 배경과의 대비를 극대화했다. 그는 “동양화와 서양화의 조화도 함께 이루고자 했다”며 “서양의 원근법을 담은 반사경 안 풍경, 자연에 순응하며 살고자 하는 동양철학이 나타난 이동시점의 빨갛고 따뜻한 배경을 그렸다”고 덧붙였다.
작가는 “이번 전시로 현대회화로서 한국화가 가능한지 보고자 했다”며 “묵유오채(墨有五彩: 먹에 다섯 가지 색이 있다)라는 말이 있다. 먹에 담긴 색을 잘 드러내야 한다는 뜻이다. 젊을 때는 빨리 그리는 것이 필력이라고 생각했지만, 작품에 맞는 붓질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장지에 먹, 분채로 그린 ‘포구는 반달’ ‘마른 도미’ ‘철조망 블루스’ ‘행 - 아름다운 시절’과 같은 신작을 볼 수 있다. 능란한 붓질로 먹의 농담을 조절해 표현한 선들이 돋보인다.
그러나 전시에서 주목할 것은 이 같은 장르적 기법보다 그림에 담고자 한 김선두의 철학이다. “삶에도 이러한 순간이 필요하겠죠. 가끔 속도를 줄이거나 멈춰 서야 지나칠 뻔한 풍경을 발견할 수 있어요. 직진을 방해하는 신호를 만나야 쉬어갈 수 있고,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겠죠.”
빨간불이 들어온 신호등과 유턴 표지판을 그린 ‘나에게로 U턴하다’도 직진만 하던 삶을 돌아보고 잃어버린 나에게로 돌아간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작가의 또 다른 작품 ‘별을 만들어드립니다 - 호박’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이 작품은 도로 주변 시든 옥수수밭에서 영감을 얻었다. 시든 호박 줄기와 버려진 쓰레기와 화면 위 촘촘히 빛나는 별의 대비가 두드러져 생명과 죽음의 이미지를 한 화면에 포용하는 듯하다. 별은 언제나 하늘에 떠 있지만, 환경에 따라 시야에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욕망과 잡념을 버린 풍경 위 하늘 위에 비로소 삶의 본질인 별이 가득하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탐진치(貪瞋癡)를 버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탐욕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이라는 세 가지 번뇌를 떨쳐야 한다고요. 별은 언제나 하늘에 있는데 그게 보이기도 하고 안 보이기도 해요.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게 아니잖아요. 삶의 중요한 것들이 그런 것 같아요. 탐욕과 집착을 좀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가장 아름답고 중요한 게 보이죠. 제가 별을 그리면서 하는 생각입니다.”
중앙대 미술학부 교수인 작가는 김훈 ‘남한산성’ 표지와 임권택 감독 영화 ‘취화선’에서 최민식이 연기한 장승업 그림 대역을 맡았다. 지난해에는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받았다. 학고재에서는 네 번째 개인전이다. 전시는 다음달 1일까지.
권이선 기자 2su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