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무기 없는 세상’은 불가능한 꿈인가 [박수찬의 軍]

미 해군 차기 전략핵잠수함 컬럼비아급 상상도. SLBM을 탑재해 미국 핵 억지력의 중추적 역할을 맡을 전망이다. 미 해군 제공

“핵무기가 없는 세계가 가능하고 필요하다는 것을 확신하자.”

 

지난해 11월 24일, 일본 나가사키 폭심지 공원(핵폭탄이 투하됐던 지역에 조성된 공원)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핵무기는 안보 위협에서 우리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을 정치 지도자들이 마음에 새겨달라”며 ‘핵무기 없는 세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교황은 “많은 사람이 핵무기에서 해방된 평화로운 세계를 열망해왔다. 이 소원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이상의 실현을 향해서 노력할 필요가 있다”며 핵무기 관련 활동을 포괄적으로 금지한 유엔 핵무기금지조약 비준을 촉구했다.

 

하지만 현실은 교황의 호소와 다르게 전개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내년도 국방예산안에서 289억 달러(34조 1742억원)를 투입, 핵무기 현대화에 박차를 가할 태세다. 북한이 비핵화 협상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데다 중국, 러시아의 핵전력이 강화되는데 따른 조치로 풀이된다. 

 

미국은 핵무기 현대화와 더불어 중국, 러시아 해군을 제압하고자 해상전력 강화를 추진하고 있어 핵무기와 재래식 무기 경쟁이 함께 불붙을 조짐마저 보인다.

 

미 공군 차세대 장거리 폭격기 B-21의 상상도. 미 공군 제공

◆냉전 이후 처음으로 핵전력 재정비 나선 美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은 핵무기 전력을 강화하면서 전략적 억지력 향상을 꾀하고 있다. 

 

핵무기를 감축 대상으로 여긴 빌 클린턴 행정부, 이라크·아프간 전쟁에 몰두해 핵무기에 신경을 쓰지 못한 조지 부시 행정부, ‘핵무기 없는 세계’를 외친 버락 오바마 행정부와는 다른 행보다.

 

미 국방부가 10일(현지시간) 공개한 2021 회계연도 국방예산안에 따르면, 7054억달러 규모의 예산 중에서 핵무기 현대화에 들어가는 비용은 289억 달러다. 전체 국방예산의 약 5% 수준이다. 

 

핵무기 지휘통제체계, B-21 차세대 장거리 전략 폭격기, 컬럼비아급 탄도미사일 탑재 전략핵잠수함, 장거리 공대지 순항미사일 도입 등 핵무기 전력이 대거 포함됐다. 트럼프 행정부의 이같은 행보는 지난해 중거리핵전력조약(INF)에서 탈퇴하는 등 전략적 타격 능력 재정비와 관련이 있다는 해석이다.   

 

미국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트라이던트5가 수중에서 발사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미국은 최근 트라이던트2 SLBM에 저위력 핵탄두 W76-2를 장착했다. W76-2는 미 해군의 SLBM용 핵탄두인 W76의 폭발력(90㏏)을 5㏏(1㏏은 TNT 1000t의 폭발력) 수준으로 낮춘 것이다. 미국이 전략핵무기에 새로운 종류를 추가한 것은 수십년 만에 처음으로, 핵무기 없는 세계를 추구한 오바마 행정부 정책에서 탈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이 W76-2를 앞세운 것은 북한과 중국, 러시아의 제한적 핵도발을 예방하려는 조치로 풀이된다. 

 

미국은 압도적인 핵전력을 보유하고 있으나 북한과 중국, 러시아가 저위력 핵탄두로 제한적인 도발을 감행할 경우 이에 대처할 수단이 마땅치 않다. ICBM을 사용하면 전면적인 핵전쟁으로 번질 위험이 있다. 하지만 저위력 핵탄두를 확보하면 비례성의 원칙에 의한 대응이 가능해진다. 전면적인 핵전쟁 위협은 감소하고, 적성국가의 핵도발을 억제하는데 도움이 된다.

 

미국이 2020년대 중반을 목표로 개발중인 극초음속 미사일에도 핵탄두 장착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핵탄두를 탑재한 채 음속의 10배 이상으로 날아가는 미사일은 요격이 불가능에 가깝다. 극초음속 미사일 요격체계 개발이 진행중이지만, 실전배치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북한 등 적성국가들의 핵무기 증강도 미국의 핵전력 강화를 부추긴다. 브루스 베넷 랜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11일 미국의소리(VOA)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의 우라늄 농축시설이 두 곳이라고 가정하면 30~60개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지만, 세 곳이 있다고 가정하면 북한은 100개 이상의 핵무기를 갖고 있고, 2027년까지 200개의 핵무기를 가지게 된다”며 미국이 대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4월 칭다오에서 열린 중국 해군 관함식에서 중국의 신형 전략핵잠수함이 항해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중국 해군 막아라”…미사일 증강 나서

 

미국은 핵전력 증강과 함께 재래식 전력 강화에도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면 핵보유국 간의 전면전 위협은 낮아지지만 국지도발이나 분쟁 가능성은 높아진다. ‘핵무기를 갖고 있는 나라를 상대로 무력 대응을 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판단 하에 군사력을 사용한 분쟁 해결을 선호하게 된다.

 

미국 입장에서 분쟁 가능성이 가장 높은 나라는 중국이다. 남중국해와 대만 해협 등에서 양국은 긴장 국면을 이어가고 있다. 중국은 항공모함 랴오닝호와 산둥호를 취역시키고, 아시아 최대 크기 구축함인 055급을 만드는 등 해군력 강화에 적극적이다.

 

이에 맞서 미국은 첨단 미사일로 중국 해군을 견제할 태세다. 미 국방부가 10일(현지시간) 공개한 2021 회계연도 국방예산안에 따르면, 미 해군은 적 함정을 찾아 파괴할 수 있는 미사일 850발을 2020~2021년에 구매하는 방안을 요구했다. 중국 해군 함정 규모가 2035년에는 420척에 달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 것과 무관치 않다는 해석이다.

 

미국 록히드마틴이 개발한 장거리 스텔스 대함미사일(LRASM)이 해상 표적을 향해 날아가고 있다. 미 공군 제공

미국이 구매할 무기 중 가장 주목받는 미사일은 록히드마틴이 생산한 장거리 스텔스 대함미사일(LRASM)이다. LRASM은 지상 표적 타격용으로 개발된 장거리 공대지미사일 재즘-ER(JASSM-ER)을 해상용으로 바꾼 것이다. 탄두 중량은 450㎏ 이상으로 370~560㎞ 떨어진 적 대형 함정을 무력화할 수 있다. B-1B 폭격기와 F/A-18 전투기에 탑재가 가능하며, 함정에서 운용하면 MK-41 수직발사관으로 발사한다. 

 

미국 내에서는 B-1B 4대에 LRASM 96발을 탑재하면 중국 해군 랴오닝호 항공모함 전단을 격파할 수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록히드마틴은 2017년부터 사격시험을 실시, 이동중인 해상 표적 등을 정확히 타격해 성능을 입증했다. 

 

레이시온이 개발하는 해상 표적 타격용 토마호크 순항미사일도 미 해군이 도입하기를 원하는 무기다. 토마호크는 함정이나 항공기에서 내륙 지역의 표적을 타격하는 용도로 쓰였지만, 긴 비행거리와 정확도를 활용해 움직이는 적 함정도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됐다. 

 

미 해군 이지스구축함에서 하푼 대함미사일이 발사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해안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연안전투함(LCS)에는 노르웨이 콩스버그와 미국 레이시온이 개발한 NSM 미사일이 쓰일 예정이다. 낮은 고도로 빠르게 비행하는 NSM은 레이더 유도 대신 열영상방식으로 표적을 찾아낸다. 적 레이더경보장치를 무력화할 수 있어 탐지될 확률이 낮다. 지형추적능력도 뛰어나 지상공격에도 쓰인다. 여기에 대공미사일이지만 해상 타격에도 사용이 가능한 SM-6 미사일도 대량 도입될 계획이다.

 

1945년 일본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핵폭탄이 투하된 이후 세계적 차원의 비핵화를 주장하는 목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냉전이 종식되면서 핵무기의 필요성이 낮아졌으므로 ‘핵무기 없는 세계’ 실현이 가까워졌다는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현재 핵무기는 질적, 양적으로 늘어나는 추세다. 북한은 비핵화 협상에 나서지 않고, 중국과 러시아도 핵전력 증강에 몰두해있다. 기술 발전 추세에 맞춰 핵 우위를 통한 억지력을 유지하려는 세계 각국의 정책이 유지되면, 비핵화 대신 군비 경쟁으로 이어질 위험이 높다는 점에서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하지만 선제적 비핵화를 추구했던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이 무너진 사례를 기억하는 핵보유국들이 무조건적인 핵포기를 단행할 가능성은 낮다. ‘핵무기 없는 세계’의 꿈이 현실로 나타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한 이유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