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교수는 “화전놀이는 함경도부터 남쪽까지 꽃이 제일 좋고 봄기운이 충만할 때, 그리고 농번기가 오기 전에 남자들은 다 빼고 오로지 여인들이 일 년에 단 한 번 크게 숨을 쉬어보는 축제였다”며 “작중에선 김씨가 문득 만주를 떠돌던 힘들었던 시절에는 하지 못했던, 시집온 후 잠깐 근친간 봄날이 마지막인 까마득한 기억 속 화전놀이를 떠올린다. 현재가 어디로 흘러갈지 불길하게 예감하는 상황에서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딸들과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름다운 기억 하나를 남겨주고 싶다는 마음에서 화전놀이를 가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안동’이란 상징적 공간을 배경으로 한 작품답게 ‘화전가’는 진득한 안동 사투리로 가득 채워진다. 화전놀이 풍속을 모르는 막내딸 봉아에게 나이 지긋한 행랑어멈 독골할매가 이렇게 가르쳐 주는 식이다. “집안 어른들, 액씨들, 동기 간에 시집간 액씨들꺼정 다 모이가 이삐게 단장허고, 꽃매이 채리입고 나가니더, 나가가 바람도 시컨 쎄고 꽃도 보고 꽃지지미도 부치가 농가 먹고 노래도 하고 춤도 추꼬, 그래 일년에 딱 하루 놀다 오는 게래요….”
지금 안동에서도 듣기 힘든 고순도 사투리가 정겹고 그립게 들린다. 전주 태생인 배 교수는 이를 위해 구술사 자료나 방언 자료를 찾아보고, 또 직접 만났던 1920년대 경북 봉화 출신 지인 말씨를 참조했다고 한다. 배 교수는 “지역성 강한 사투리가 의미 전달 기능에선 방해되나 ‘말’은 의미를 전달하는 기능만 갖는 게 아니다. 사투리 자체가 가진 음악성과 아름다움은 단순히 장식적 요소뿐만 아니라 전체적 틀 안에서도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안동’을 고른 이유에 대해선 “안동, 영주, 봉화 지역이 조선시대 남인 근거지로 구한말 국권 침탈이 벌어졌을 때 가장 먼저 활발하게 의병 거사가 일어난 지역이고, 유력한 가문이 ‘나라 뺏긴 땅에선 살 수 없다’며 간도, 만주로 앞장서서 나간 곳이었다”며 “잘 아는 지역이 아니지만, 그 당시 상황을 집약해서 보여줄 수 있는 장소로 생각했다. 우리나라 여성이 주체적인 목소리를 내는 규방가사 전통이 가장 강하게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실제 지금도 안동에선 여성 가사 낭송대회가 열리고 봄에는 화전을 누가 더 곱게 부치나 경연도 하고, 많은 가사문학 작품이 남아있다”고 설명했다.
‘화전가’에는 이처럼 화전놀이, 사투리와 경신수야는 물론 지금은 잊힌 풍물과 기억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이 가득하다. 배 교수는 “큰 의미가 없어도 세계를 충만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 커피, 설탕, 한복 노리개, 장신구, 옷감의 느낌 등. 좌익이냐 우익이냐, 통일이냐 분열이냐, 민족이냐 반민족이냐, 어떤 게 옳고 그르냐로 서로 싸우는 시절에 이런 삶의 사소한 즐거움, 아름다움은 무의미한 게 된다. 중대한 의미를 두고 다투는 시대의 사소하고 무의미한 것들에 대해 얘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예술인들의 삶을 다룬 ‘적로’와 광복 직후를 다룬 ‘1945’에 이어 한국전쟁 직전을 다룬 ‘화전가’까지 배 교수 신작은 근현대사를 훑어 내려오고 있다. 배 교수는 “먼저 돌아가신 김동현 형(고 김동현 연출·2016년 별세)하고 작업할 때가 첫 출발점이었다. 근현대사 시리즈를 함께 공동창작하려 마음먹었다. 지금 이 삶의 모양을 만들어 놓은 가까운 과거에 대해 우리 공동체가 가진 기억이 너무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다. 쉽게 말해 과거를 너무도 모른다. 먼 과거가 아닌데 너무 참혹해 쉽게 입에 꺼내놓지도 않는다.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러한 시간에 대한 기억을 우리가 더듬어 보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1945’도 사실 광복 당시 귀국하는 도정에 있던 군상들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 ‘민족적·국가적 정체성’이라는 게 어떻게 만들어졌고 그 과정에 어떤 폭력이 개입됐으며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를 나름대로 질문한 것”이라며 전후 상황에 대한 작품이 다음 차례라고 설명했다.
작법(作法)에 대해 배 교수는 “정해진 생각이나 입장을 최대한 갖지 않으려 한다”고 설명했다. 의미 과잉인 세상에서 의미로부터 자유로운 글을 쓰는 작가도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얘기다. “딱딱한 의미가 칼처럼 부닥칠 때는 그런 의미로부터 밀려난 무의미가 훨씬 더 충만하게 삶을 담아낼 수 있다 “며 “그때그때 공동체 안에 있는 존재로서 필요한 이야기들, 쓸모가 있는 이야기들을 어떻게 하면 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고 말했다.
배 교수 작품의 중심은 ‘화전가’처럼 여인들이 차지하곤 한다. 극을 이끌어가는 주축이어야 할 ‘악인’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점도 특징이다. 배 교수는 “이야기꾼으로서는 어떤 것으로도 가둘 수 없는 여백을 가진 존재를 찾아다니게 마련이다. 기존의 뻔한 이야기로는 포섭할 수 없는 존재, 가장자리에 있는 존재를 찾다 보니 자연스레 여인들 이야기가 되었다. ‘화전가’에서도 실제 그 당시 남자들은 일제를 거치며 죽었거나, 몸을 상했거나, 멀리 떠났거나, 감옥에 가 있었다. 삶의 터전을 지키고 삶을 보듬어 안으며 버틴 건 여인들이었다”고 설명했다. 악인의 부재 역시 “ ‘이 사람은 선하고 이 사람은 악하다’는 범주 안에 들어가면 악인을 비난하고 파멸로 이끌어가는 것밖에 없다. 분명 현실에선 선한 사람이 있고 아무리 따져봐도 ‘이 사람, 비루하고 악하다’고 할 존재가 있다. 그런데 그건 너무 쉬운 이야기다. 우리 대다수는 그 언저리에, 어떨 때는 선하고 어떨 때는 비루하고 남루하고 악한 모습을 보인다.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세계를 살아간다. 칼로 무 자르듯 판단하기 힘든 게 삶의 대체적인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배 교수는 “항상 새 작품 쓸 때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들고, 그래서 항상 흔들리곤 했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며 “‘화전가’를 통해 고통스러운 순간 속에서도 아름다운 존재를 무대 위에 보여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명동예술극장에서 2월 28일부터 3월 22일까지.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