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유럽 미술을 보면 놀라울 정도로 어둡고 침울한 것들이 많다. 가령 에드바르 뭉크의 경우 ‘절규’라는 작품으로 유명하지만, 그의 작품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주제는 질병과 죽음이다. 대표적인 작품이 그의 1886년 작품, ‘아픈 아이’다. 십대로 보이는 핼쑥한 얼굴의 소녀가 기운 없이 침대에 기대어 누워 있고,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여성이 침대맡에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아이의 엄마는 간호에 지쳤거나, 아니면 죽어가는 아이의 상태에 절망해서 울고 있는 듯하다. 그림 속의 십대 아이는 결핵으로 세상을 떠난 뭉크의 누나 소피다.
뭉크가 한 살 위의 누나가 세상을 떠나는 것을 목격한 것은 감수성이 한창 예민했을 열네 살 때였다. 이후로 질병과 죽음, 그리고 남은 가족들의 슬픔은 뭉크에게는 중요한 모티프가 되었고, 그의 많은 작품에 비슷한 장면이 등장한다. 비록 뭉크가 다른 예술가들보다 좀 더 죽음이라는 주제에 집착한 것은 사실이지만 (뭉크 본인은 80세까지 살았다) 당시 예술가들은 죽음을 주제로 삼는 경우가 흔했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 죽음은 한 가지 질병에서 비롯되었다. 바로 결핵이다.
결핵은 수천년 동안 인류를 괴롭혀온 질병이다. 인류학자들은 5000년 전 유골에서도 결핵의 흔적을 찾아냈고, 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고대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는 결핵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젊은 의사들은 증세가 악화된 결핵환자들을 맡지 말라고 충고했다.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인데 세상을 떠나게 되면 젊은 의사의 평판이 나빠진다는 이유였다.
이 병이 결핵균에 의해 전염되는 줄 몰랐던 당시 사람들은 결핵이 유독 도시에서 많이 퍼지는 것을 보고 서구의 오랜 잘못된 지식이었던 ‘나쁜공기(miasma)’에 의해 전염을 의심했고, 따라서 결핵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이나 바닷가에서 휴식을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등장한 것이 요양원(sanatorium)이다.
치료법이 없고 원인을 모르니 결핵은 전 세계를 휩쓸었고, 19세기 초에는 전체 인구의 7분의 1이 결핵으로 사망했다는 연구가 있을 만큼 흔한 질병이 되었다. 잘 알려진 19세기 인물들의 사인을 결핵으로 짐작하면 크게 틀리지 않는 이유다. 작곡가 프레데리크 쇼팽도, 작가 에밀리 브론테, 안톤 체호프, 제인 오스틴, D H 로렌스, 모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다.
그렇다 보니 그림뿐 아니라 오페라, 소설 등 다양한 예술작품에서 결핵환자가 등장하게 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오펜바흐의 ‘호프만의 이야기’에 모두 결핵환자가 등장한다. 문학작품에서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포함해 토마스 만, 찰스 디킨스, 서머싯 몸의 작품에도 결핵환자들이 등장하고,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의 주요인물 판틴도 결핵으로 세상을 떠난다. 프랑스 화가 클로드 모네가 아내의 죽음을 그린 ‘카미유 부인의 죽음’(1879)에서도 사인은 결핵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결핵이 그렇게 온 사회를 슬픔으로 몰아간 질병임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작가와 예술가들은 이 질병을 낭만적인 시각으로 봤다는 사실이다. 작가 에밀리 브론테는 자신의 동생 앤이 결핵을 앓는 것을 보고 “내 생각에 결핵은 아름다운(flattering) 질병”이라고 적었다. 아름다운 질병이라는 게 무슨 말일까?
에밀리 브론테가 사용한 형용사 ‘플래터링(flattering)’은 엄밀하게는 ‘외모를 돋보이게 하는’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가령 옷이나 조명이 사람을 돋보이게 할 때 사용된다. 지금은 거의 잊혀진 질병이지만, 결핵환자의 모습을 설명한 표현을 보면 하나같이 체중이 줄어 ‘삐쩍 마른’ 모습이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서구에서는 결핵을 지금처럼 ‘튜버클로시스(tuberculosis)라고 부르지 않고 ‘콘섬션(consumption)’이라고 불렀는데, 소비·소모를 뜻하는 이 단어는 이 병의 환자가 설사 등으로 체중이 빠지고 기력을 쇠하는 증세를 두드러지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핏줄이 드러날 정도로 피부가 하얗고 투명’할 뿐 아니라 ‘볼과 입술은 유난히 핏기가 돌아서 장미빛’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당시 여성들이 미의 기준으로 삼았던 ‘가녀린 모습’인 것이다. 이는 앞서 이야기한 뭉크의 누나의 모습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다른 전염병이라면 환자가 보기 비참한 꼴을 하고 있었겠지만, 엉뚱하게도 당시 여성들이 바라던 외모를 선사하는(?) 질병인 탓에 죽어가는 환자가 한없이 아름답고, 그래서 더욱 가엽고 불쌍하고, 그래서 더욱 애절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특히 젊은 여성들이 유난히 많이 걸린 질병이라는 사실 (앤 브론테뿐 아니라 에밀리 브론테도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역시 결핵의 이미지를 극적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이쯤에서 눈치를 챘겠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한 채 요절하는 젊은 여성’이 19세기식 비극의 여주인공에게 가장 걸맞은 캐릭터다. 아니, 우리가 아는 19세기 문학과 예술작품 속 여주인공의 모습은 결핵의 유행으로 탄생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물론 치명적인 질병이 아름다울 리는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전염병일 경우, 살아남은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비슷한 슬픔을 간직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에이즈(AIDS)가 전 세계를 휩쓸고 지난 후 1996년에 나온 브로드웨이 뮤지컬 ‘렌트(Rent)’에서 에이즈로 죽어가는 여성 미미(Mimi)는 정확히 1백년 전에 나온 오페라 ‘라보엠’에서 결핵으로 죽어가는 여성 미미에 대한 오마주이자 현대적인 해석이었다. 예술은 이렇게 항상 현실에 발을 딛고 있다. 그 현실이 아무리 비극적이어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