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1일(현지시간) 대국민연설에서 영국을 제외한 유럽에 대해 사실상 미국 입국을 금지하는 강경책을 내놓은 것은 유럽 국가들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환자가 걷잡을 수 없이 늘고 있는 데 따른 것이다. 발병국인 중국을 제외하고 확진자가 처음으로 1만명을 넘어선 이탈리아를 비롯해 프랑스 스페인 독일 스위스 노르웨이 덴마크 네덜란드 스웨덴 등 유럽연합(EU) 주요 국가들이 한국·일본을 제외하고 확진자가 많은 상위 10개국에 모두 포함됐다.
미국 내 상당수 집단발병지가 유럽을 다녀온 여행객에게서 비롯됐다는 판단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날 확진자가 1300명을 넘어서는 등 미국 내 전염이 악화일로인 상황에서 유럽 국가들과의 교류를 차단해 추가적인 감염 경로를 최대한 막겠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 집무실에서 대국민 연설에 나선 것은 취임 후 두 번째다. 그는 지난달에만 해도 기자회견에서 코로나19를 독감에 빗대며 감기 환자 흉내를 내는 여유를 보였지만 이날은 웃음기 없이 신중한 자세를 유지했다.
미 백악관은 트럼프 대통령 연설 직후 “이번 조치는 최근 14일 동안 유럽 26개국이 포함된 솅겐조약 지역에 체류한 외국인에게 적용된다”며 “유럽을 광범위하게 오가는 여행은 미국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고 경고했다.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서라도 솅겐조약이 보장한 유럽 내 ‘이동의 자유’를 한시적으로 제한할 필요가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으로 해석된다.
EU는 강력 반발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과 샤를 미셸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12일 공동성명을 내고 “EU는 미국의 결정이 일방적으로, 협의 없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반대한다”며 “EU는 바이러스 확산을 제한하기 위해 강력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EU 국가들에 초강수 대응책을 내놓은 것과 달리 우리나라와 중국에 대해서는 여행금지 등의 조치를 완화할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는 “우리는 중국과 한국의 상황을 모니터링하고 있다”며 “이들 국가의 상황이 개선되는 것에 따라 조기개방 가능성을 위해 현재 시행 중인 (여행) 제한과 경보를 재평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확진자 증가폭이 누그러든 것이 가장 큰 배경이다. 또 우리나라의 경우 미국행 항공기 탑승객에 대해 탑승 전 발열체크 등을 선제적으로 시행해왔고, 신속한 진단검사를 통해 국제사회에서 코로나19 대응의 모범사례로 평가받는 점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미 인터넷매체 악시오스는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으로부터의 입국을 차단하는 방안을 논의했으나 입국 규제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전날 보도하면서 미군이 대규모로 주둔하고 있는 점도 고려됐다고 분석했다.
이날 미국 내 감염자는 1300명을 넘어섰고, 38명이 희생된 것으로 집계됐다. 대규모 집회 전면금지를 선포한 워싱턴주의 확진자가 300여명으로 가장 많고, 뉴욕주(200여명), 캘리포니아주(130여명) 등 전체 50개주 가운데 90% 이상에서 감염자가 발생했다. 총 23개 주가 비상사태를 선포했고, 수도 워싱턴도 이날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비상사태를 선언하면 비상 펀드를 사용할 수 있고, 각종 규제에 구애받지 않고 자원과 인력을 코로나19 대응에 투입할 수 있다.
앤서니 파우치 미 국립보건원 산하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NIAID) 소장은 하원 청문회에서 “사태는 더 악화할 것”이라면서 “다음 달이 확산 차단의 고비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빌 더블라지오 뉴욕시장은 이번 사태가 정상화하는 데 최소 6개월이 걸릴 것으로 내다봤다.
워싱턴=정재영 특파원 sisleyj@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