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는 왜 친구들이랑 같이 수영 못해요?””
세 남매의 어머니인 이효희(38)씨는 최근 둘째 남유정(가명·6세)양의 물음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유정양이 다니는 유치원에서 수영 수업이 열렸지만 뇌전증 때문에 아이를 수업에 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의식을 잃거나 경련을 할 수 있는 뇌전증 환자에게는 수영은 다른 사람들 이야기일 뿐이다.
유정양은 지난해 9월 집에서 뛰어놀다 턱이 찢어졌지만 8시간이 돼서야 봉합 처치를 받았다. 집 근처 성형외과에서 “뇌전증 환자에게 마취 주사를 놓는 게 위험하다”며 상처에 붕대만 감아준 채 다른 병원으로 돌려보냈기 때문이다. 유정양은 가벼운 감기만 걸려도 뇌전증 전문의가 있는 대학병원 신세를 져야 한다. 장시간 이동과 긴 대기 시간 중 발작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 유정양은 발작의 전조 증상이 없어 어머니 이씨는 출근을 해서도 늘 노심초사하며 하루를 보낸다.
26일은 ‘퍼플 데이(Purple Day)’다. 2008년 당시 9살의 캐나다 소녀가 자신이 앓고 있는 뇌전증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보라색을 입자고 제안한 것에서 유래해 국제적 캠페인이 됐다.
10년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과거 ‘간질’로 알려졌던 뇌전증 환자들은 여전히 사회적 편견과 제도적 지원 부족으로 심리적·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뇌전증은 일시적으로 특정 뇌세포들이 과도하게 흥분하거나 조절 능력을 상실해 발작을 유발하는 질환이다. 뇌전증은 뇌졸중·치매와 더불어 3대 뇌질환으로 꼽히지만 환자의 발작 증세를 이유로 ‘귀신에 씌었다’거나 정신질환이라고 오해받는 경우가 여전하다.
25일 한국뇌전증협회 등에 따르면 국내 뇌전증 환자는 약 40만명으로 추정된다. 매년 10만명당 20~70명의 새 환자가 발생하고 있으며 소아기(0~9세)와 60세 이상의 노인에게서 많이 나타난다. 70%가 넘는 환자들은 약물치료를 통해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고, 일부는 완치되기도 한다. 하지만 질병의 주요 증상인 발작으로 인해 환자들은 일상생활이나 경제활동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사회적 편견과 낙인으로 인해 교육·취업·대인관계에서 차별을 경험한다.
17세에 처음 증상이 나타나 40년 이상 뇌전증을 앓고 있는 이성용(가명·58)씨는 평생에 걸쳐 받아온 차별적인 시선이 이제는 익숙하다. 이씨는 수십년을 가구점에서 일하다 2년여전부터 공사현장을 다니며 일용직으로 일하고 있다. 가구점이 문을 닫으며 비슷한 일을 찾아봤지만 어디에서도 뇌전증 환자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목재에 약품을 칠하는 일을 해온 이씨는 “발작은 일주일에 2~3번꼴로 나타난다. 업무에도 아무 지장을 주지 않는다”며 “혼자만의 생각일지 몰라도 나를 거부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뇌전증은 긴 유병 기간이나 집중적인 돌봄을 필요로하는 치매나 희귀·난치성질환, 중증만성질환 등과 비교할 때 의료적, 경제적, 심리적 지원이 부족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홍승봉 삼성서울병원 신경의학과 교수이자 대한뇌전증학회 명예회장은 “한국은 다른 질환과 달리 뇌전증에 대해서만큼은 후진국 수준의 낙후한 의료 지원 체계를 가지고 있다”며 “뇌전증 환자의 권리 보장을 법으로 제정해 어느 지역에서든 동일한 수준의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홍 교수는 이를 위해 뇌전증 환자를 진료할 수 있는 거점병원을 전국에 설치하고 수술로봇 등 첨단 장치 도입, 대국민 인식 개선 캠페인이 병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서는 단일 질환에 대한 개별법이 다른 질환에 대한 별도법 요구를 촉발해 행정법규 혼란과 형평성 논란을 낳을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보건복지부는 이에 대해 뇌전증 치료의 상당 부분이 건강보험의 적용을 받으며 현행 체계로 해결되지 않는 부분은 장애인법과 희귀난치질환법이 보완해 지원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이종민 기자 jngm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