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는 아시아병”… 유럽, 불구경하다 ‘21세기 페스트’ 불러 [세계는 지금]

방심 대가 ‘제2 진원지’ 고통 / 48개국 확진자 28만명·사망 1만6000명 / 8000여명 희생 伊 치사율 10%대 치솟아 / 인력·장비 부족으로 의료시스템까지 마비 / 亞보다 시간 있었지만 심각성 인식 못해 / 발생 초기 현지 아시아인들 노골적 혐오 / 뿌리 뽑지 못한 인종차별의 잔재 ‘부메랑’ / 정부 무능·의료체계 부실·고령화 화 키워 / EU 전문매체 “한국 방역 모범사례 권장”
방심의 대가가 이토록 클 줄은 몰랐다. 전 세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가 50만명을 훌쩍 넘은 가운데, 모두의 이목이 쏠린 지역은 단연 유럽이다. 지난해 말 코로나19 등장 이래 두 달여 동안 유럽이 한 것은 강 건너 불구경과 인종차별이 전부란 지적은 뼈아프다. ‘무늬만 세계화’ 시대를 산 이들에게 바이러스는 더욱 가혹하게 침투했다. 코로나19 제2의 진원지가 된 유럽이 ‘21세기 페스트’를 자초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슈피겔 표지와 이를 패러디한 사이버외교사절단 반크 제작 포스터. 반크는 '메이드 인 차이나'라는 제목으로 인종차별을 조장한 독일 주간지 슈피겔 보도를 비판하는 포스터를 지난달 18일 배포했다. 반크 제공

◆악몽 언제 끝나나… 선진국의 굴욕

 

‘코로나 대륙’이 된 유럽의 코로나19 확진자와 사망자는 이미 중국을 크게 웃돌았다. 언제까지 공포가 계속될지 가늠할 수도 없다. 들불처럼 번지는 확산 추세로 보건대 아직 최악은 오지도 않았다. 생활 수준과 경제 규모 면에서 내로라하는 유럽 선진국들의 굴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27일(한국시간) 통계정보사이트 월드오미터에 따르면 유럽 48개국의 코로나19 확진자는 28만여명, 사망자는 1만6100여명이다. 전 세계 확진자의 절반 이상이다. 사망자 수로도 이탈리아(8215명)와 스페인(4858명)은 중국(3292명)을 추월한 지 오래다.

 

가장 상황이 심각한 이탈리아의 코로나19 치사율은 세계 최고인 10%대다. 누적 확진자 8만589명이 나온 이탈리아의 뒤를 스페인(6만4059명)과 독일(4만7373명)이 추격하고 있다. 지난 16일 “제발 집에 좀 있으라”며 전 국민을 꾸짖는 대국민 담화로 화제가 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프랑스는 누적 확진자가 2만9155명을 기록했다.

 

이외의 유럽 국가들도 확산세가 본격화했다. 스위스(1만1951명)도 확진자 1만명을 넘었다.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적 충격에 대한 어두운 전망도 잇따르고 있다. 독일경제연구소(IW)는 최악의 경우를 가정해 독일의 올해 국내총생산(GDP)이 전년보다 10% 줄어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크리스토스 스타이쿠라스 그리스 재무장관은 현지 방송에 출연해 올해 그리스 경제가 1∼3% 사이에서 위축될 것으로 예상했다.

◆방심, 인종차별이 부른 재앙… 한순간 나락

 

백신도 치료제도 없는 신종 바이러스인 데다 감염성마저 역대 최고 수준인 초유의 사태. 남 일처럼 뒷짐 지고 보았던 유럽에 현 상황은 예고된 참사였다. 바로 직격탄을 맞은 아시아에 비해 바이러스가 건너가기까지 최소 한 달의 시간이 더 주어졌음에도 유럽은 검사키트 개발도, 보건·의료시스템 대비도, 솅겐조약 관련 조정도 제대로 대비하지 않은 듯하다.

 

뿌리 뽑지 못한 인종차별의 잔재는 비상시국에 대한 냉철한 대비를 방해했다. 코로나19를 ‘아시아인이나 걸리는 병’ 정도로 인식한 안일함이 대응의 긴장감을 낮추고, 사태가 급속도로 악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코로나19 발생 초기 유럽인들이 현지 거주 아시아인들을 ‘바이러스’로 칭하며 언어적 물리적 폭력을 가했다는 소식이 연일 보도됐다. 대중이 노골적 혐오를 방사했다면 언론은 교묘한 인종차별을 부추겼다. 현지 매체들은 코로나19 속보를 전하며 아시아를 연상케 하는 이미지와 문구를 심심찮게 끼워넣었다.

 

‘여기서는 일어날 리 없어(It Could Never Happen Here)’라는 팽배한 인식이 유럽의 코로나19 참사를 부른 핵심이라고 뉴욕타임스(NYT)는 지적했다. 산드라 잠파 이탈리아 보건부 차관은 NYT에 “이탈리아는 중국의 사례를 실질적 경고로 인식하지 않고 ‘우리랑은 상관없는 공상과학소설’로 취급했다”며 이 점이 가장 뼈아픈 지점이라고 밝혔다.

 

유럽 주요 정치인 1호 감염자인 이탈리아 집권당 대표 니콜라 진가레티 의원(민주당)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진가레티 대표는 지난달 27일 “밀라노에서의 식전주 한 잔”이라며 잔을 부딪치는 사진을 올리더니 “우리 일상은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여유를 부렸다. 그러나 이날 400여명이던 이탈리아 코로나19 확진자는 10일도 채 지나지 않아 5883명으로 급증했고, 진가레티 본인도 확진 판정을 받았다는 영상을 올렸다.

 

지금 유럽의 현실은 이를 후회할 시간조차 없을 만큼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자고 일어나면 수천명씩 감염자가 늘고, 일부 지역에선 30분에 1명꼴로 사망자가 나온다. 정신 차릴 겨를도 없이 몰아닥친 준전시 상황의 긴박함,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사재기(panic buying) 행렬에 동참하거나 집 안에 갇혀 고독을 견디는 일 정도다.

 

유럽의 의료시스템은 연일 쇄도하는 환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치사율이 낮은 대신 감염성이 높은 코로나19 특성상 환자 수가 계속해서 급증하기 때문이다. 중환자 치료를 위한 병상 부족이 가장 심각하다. 확산 추세는 한창인데 이미 의료 현장은 마비돼 의료진과 의료장비, 병실 부족의 삼중고에 처했다. 아틸리오 폰타나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주지사는 “곧 신규 환자들을 치료할 수 없는 상황이 올 것”이라고 우려했다.

스페인의 한 병원에 코로나19 환자들이 병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닥에 줄지어 누워 있다. 유럽은 쏟아지는 환자로 의료장비와 시설 모두 부족한 상태다. 트위터 캡처

이탈리아 다음으로 확진자가 많은 스페인은 22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퍼진 영상 하나로 충격을 안겼다. 올라온 지 5시간여 만에 트위터 조회수 12만회 이상을 기록한 이 영상은 스페인의 한 병원 복도 바닥에 테이프로 줄을 긋고 수건을 깔고 줄줄이 누워 있는 환자들의 모습을 담았다. 유럽 내 여러 의료시설의 상황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관측된다.

 

◆‘확산 늦추기’가 유일한 대응… 韓 부러운 유럽

 

이 와중에도 상당수 유럽인이 주점과 해변, 공연장 등에 모여든다는 뉴스가 수차례 보도되자 세계는 경악했다. 코로나19 확산 예방 제1 수칙인 ‘사회적 거리 두기’를 무시하는 행위다. 말 안 듣는 국민들에게 프랑스 대통령은 유튜브 생중계로 불호령을 내렸을 정도다.

 

바이러스 제어가 안 되는 상황에서 국민 통제로라도 감염병 확산을 막고자 했지만 쉽지 않았다. 비상시국 앞에 선진국의 자부심은 무너졌다. 공무원의 관리능력, 의료체계 등이 부실한 데다 고령화까지 진행된 상황이 악재를 키웠다. 아시아에 비해 이런 취약점이 도드라진 유럽은 결국 ‘확산을 막는다’가 아닌 ‘확산을 늦춘다’는 전략을 택했다.

 

일부 나라에선 정부의 이른 체념이 민심의 분노를 자극하기도 했다.

 

영국은 봉쇄가 아닌 ‘집단면역’(herd immunity) 정책을 초기에 내세웠다가 여론의 강한 반발에 직면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지난 12일 발표한 집단면역은 집단 내 대부분 사람이 특정 질병에 걸려 면역력을 가진 사람이 많아지면 집단 전체가 저항력이 커진다는 내용이다. 존슨 총리는 “감기 증상이 있는 사람만 집에 7일간 머물고, 그렇지 않으면 평소대로 생활하라. 감염 의심자와 접촉자들에게 강제 검사를 받게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코로나19 인명 피해가 가장 극심한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 베르가모시 공동묘지 내 임시천막에 코로나19 사망자의 시신이 안치된 관이 18일 빈틈없이 들어차 있다. 베르가모=EPA연합뉴스

그러나 이 정책을 고수할 때 최대 26만명의 목숨이 희생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고, 존슨 총리를 영화 속 살인마 ‘조커’에 비교하는 풍자가 이어지자 영국 정부는 16일 강경 대응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국민 전체 이동금지령이 사실상 유럽 주요국에 모두 내려졌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에 이어 영국도 결국 23일 전 국민을 대상으로 3주간 이동과 여행을 금지한다고 밝혔다. 독일 정부는 공공장소에서 2명을 초과하는 모임을 2주간 금지했다.

 

유럽인들에게는 드라이브 스루를 동원해 매일 엄청난 양의 코로나19 검사를 하고, 국가 지시도 잘 따르는 편인 한국의 사례가 부러워 보일 법도 하다.

 

유럽연합(EU) 전문매체 유랙티브닷컴은 “한국의 헌신적 노력과 투명성이 코로나19 확산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있다”고 지난 16일 보도했다. 한국의 방역에 대해 매체는 “투명성과 최신 기술, 기관과 시민의 책임 있는 접근법을 결합한 결과”라며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애쓰고 있거나 향후 몇 주 내에 악화될 상황인 국가들에 모범사례로 권장된다”고 강조했다.

 

정지혜 기자 wisdom@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