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안되기’만 강조 성평등 외면한 성교육

“부모 허락없이 이성 초대 말것” 등 / 피해자에 책임전가 교육 표준안 / 수차례 지적에도 개편 지지부진 / 전문가 “기존 성교육 표준안 폐지 / 학교에 포괄적 성교육 도입해야”
사진=연합뉴스

텔레그램을 통해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의 성 착취 불법촬영물을 공유한 ‘n번방’ 범죄에 대한 국민적 공분이 높아지면서, 이 같은 범죄의 재발을 막기 위한 근본 대책으로 ‘제대로 된 성교육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특히 구속된 조주빈(25)씨가 운영한 ‘박사방’ 회원 출신으로 별도의 성착취 방을 만든 ‘태평양’ 이모(16)군 등 10대 가해자가 드러나는 상황에서 올바른 성교육의 필요성이 더욱 강조된다.

문제는 현재 교육 현장의 성교육이 여전히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성 인식을 심어주기에는 부족하다는 점이다.



31일 교육부의 ‘2020년 학생건강증진 정책방향’을 보면 교육부는 학교 성교육 내실화를 위한 기본 방침으로 ‘학교 성교육 표준안’을 제시하고 있다. 2015년 보급된 해당 성교육 표준안은 잘못된 성 인식과 성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내용이 담겨 발표 당시부터 큰 비판을 받았다. “여성은 한 특정 남성에게만 성적으로 반응하는 데 비해 남성은 성욕이 충동적으로 급하게 나타난다”거나 “거절 의사를 분명히 하지 않았을 때 성폭력·임신·성병 등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며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등의 내용이 대표적이다.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을 협박해 성 착취 불법 촬영물을 제작하고 유포한 텔레그램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이 지난 25일 오전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검찰로 송치되고 있다.

앞서 성교육 표준안에 대한 비판이 커지자 교육부는 표준안을 바탕으로 한 교육 자료의 내용을 일부 수정해 2017년 현장에 배포했다. 그러나 여전히 ‘부모님이 안 계실 때 허락 없이 이성 친구를 초대하지 않는다’는 식의 ‘피해자 되지 않기’를 강조하는 내용이 남아있다. 또 2018년 3월에는 김상곤 당시 교육부 장관이 사회관계장관회의에서 학교 성교육 표준안을 개편해 지난해 상반기 중 보급하겠다고 밝혔지만 개편 작업은 멈춰 있다. 교육부 관계자는 “3차례 연구과제를 발주했지만 모두 유찰돼 현재 개편 계획은 없다”면서 “양성평등 차원에서 다른 교육을 보완해 진행하고 있고, n번방 관련 대응책 마련을 위해 노력 중”이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n번방 범죄에 대한 교육계의 실질적인 대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지난 29일 서울시교육청은 “n번방 사건은 일상의 성차별 문화, 여성의 성적 대상화 등 왜곡된 성문화가 폭력적으로 표출된 것”이라며 “학교 성교육이 사회적 인식의 변화와 학생의 눈높이에 부응해 실효성 있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 함양을 위한 성평등 관점의 체계적인 성교육 자료를 개발해 학교 현장에 보급하겠다”고 밝혔다.

'제2 n번방' 운영자 로리대장태범의 재판이 열린 31일 춘천지방법원 앞에서 '디지털성폭력대응 강원미투행동연대' 회원들이 피켓을 들고 텔레그램 대화방을 통한 성 착취물 유포자 등에 대한 엄중한 처벌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성교육 표준안을 폐지하는 등 교육 당국의 성교육이 크게 변화해야 n번방과 같은 범죄의 재발을 막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인권·관계 등을 포함해 올바른 성 가치관을 심어줄 수 있는 ‘포괄적 성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현숙 탁틴내일 상임대표는 “교육 현장의 성교육도 국제 성교육 가이드라인처럼 ‘포괄적 성교육’으로 바뀌어야 한다”면서 “n번방과 같은 디지털 성범죄를 막기 위해서는 과거보다 성교육이 훨씬 강조돼야 한다. 가이드라인 마련뿐 아니라 충분히 교육할 수 있는 시수 확보와 교사 역량 강화 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초등성평등연구회도 성명에서 “성교육 표준안을 필두로 한 기존의 성교육은 피해자가 피해사실을 드러낼 수 없게 하고, 남성 아동·청소년에게는 자신의 성욕과 이를 해소하려는 욕구가 정당한 권리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었다”면서 “성에 대한 청소년들의 인식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기존의 성교육 표준안을 폐지하고 올바른 성인지 관점에서 만들어진 성교육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지혜 기자 keep@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