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과학에서 공학, 기술, 산업으로 이어지는 과학기술의 개발 단계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어떤 단계에서든지 핵심 문제의 해결이 과학에서 산업에 이르는 전 주기의 성과를 결정짓는다. 특히 기초과학의 역할은 더 중요해졌다.
그 예를 우리는 방사광가속기에서 본다. 방사광가속기는 전자를 고에너지로 가속하여 발생하는 빛을 이용해 극미세물질을 관찰하는 현미경과 같은 기능을 하는 연구시설이다. 여기에서 전자를 가속하는 장치가 에너지의 수준에 따라 수백미터에서 수 킬로미터의 선형 또는 원형 구조를 갖는 점과 고난도의 운영기술 때문에 개별 기관이나 기업이 갖출 수 없는 국가 대형 연구시설로 분류한다.
활용 분야는 물리, 화학, 생물 등 기초과학뿐만 아니라 반도체·디스플레이 등 전자산업, 신약 개발을 비롯한 바이오산업까지 첨단산업의 전 분야에 이르고 있다. 최근 차세대 원형 방사광가속기의 부지 선정을 앞두고 보이는 지자체의 관심을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으로 보면 긍정적인 면이 있다. 그만큼 국가 대형 연구시설의 필요성과 가치에 대한 판단도 중요해졌다.
얼마 전 과거 내가 근무했던 미국 아르곤 국립연구소와 연구소 내에 설치된 방사광가속기의 현황을 알아보았다. 여기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영향을 피할 수 없었다. 주지사의 결정으로 연구소는 폐쇄됐으며 연구원들은 재택근무 중이었다. 그러나 방사광가속기만은 예외였다. 가속기는 운영 중이었으며, 코로나바이러스와 관련된 연구는 실험 시간을 우선적으로 배정한다고 공고하고 있었다.
감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연구소를 일시 폐쇄하면서도 대형 연구시설이 코로나19에 대응하는 연구에 몰입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방사광가속기의 일반적인 응용 분야에 생화학 분야가 당연히 포함되어 있지만 가속기가 국가재난 상황에서 바이러스 연구를 최우선으로 하는 시간이 올 것을 예측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국가적인 대형 연구시설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지금 추진되고 있는 우리나라의 방사광가속기는 일본의 수출규제라는 현실 문제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5년 이상 걸리는 건설 기간 이후에는 국가적으로 훨씬 더 중요한 목적으로 활용되거나 지금은 생각하지 못하는 혁신적인 기술이 창출될 수 있다.
차세대 방사광가속기의 수요는 이미 여러 분야에서 제기되었고 불편함을 감수하고 해외 연구시설을 찾는 국내 연구자가 많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차세대 방사광가속기의 건설은 시기적으로 늦은 감도 있다. 그렇더라도 국가 대형 연구시설의 구축이라는 큰 그림에서 논의되기를 바란다. 현재 대형 연구시설로 운영 중이거나 건설 중인 국내 가속기는 포항의 3세대 방사광가속기와 4세대 선형 방사광가속기, 부산의 의료용 중입자가속기, 경주의 양성자가속기, 대전의 중이온가속기가 있다. 국가 대형 연구시설들은 어떤 역할 분담이나 연계성을 갖는지도 검토되어야 한다.
과학기술과 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큰 대형 연구시설의 지역적 분포를 고려한 배치 또한 국가 균형발전이라는 중요한 가치 실현의 한 방향이다.
1986년 포항공대 개교와 함께 논의가 시작된 포항 방사광가속기 연구소 건설, 2008년 과학비즈니스벨트와 기초과학연구원 논의로부터 시작된 중이온가속기 건설에 이어 2020년 에너지 혁신도시인 나주에 4세대 원형 방사광가속기 건설을 논의하는 것은 국가 과학기술 자원의 효율적인 활용과 전 국토의 과학 산업화라는 역사적 과정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