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유가가 마이너스로 떨어지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미국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20일(현지시간) 5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산원유(WTI)가 배럴당 -37.63달러에 거래를 마감했다. 이는 곧 원유 판매자가 구매자에게 역으로 돈을 줘야 원유를 넘길 수 있다는 뜻이다. 이날 5월물 WTI 가격은 지난 17일 종가 18.27달러에서 약 305%(55.90달러) 폭락한 수치다.
국제 유가는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한 경제 동결과 수요 급감, 원유 저장용량 한계 도달, 원유시장의 선물 만기 도래 등의 요인이 겹쳐 마이너스 가격이 형성되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WTI 5월물과 달리 6월 인도분은 이날 배럴당 20.43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5월 인도분은 저장용량 초과 등으로 더는 살 수 없으나 6월 인도분은 배럴당 20달러가 넘는 가격에 구매한 것이다. 선물 투자자들은 5월물 WTI 만기일인 21일을 하루 앞두고 5월물 원유 대신에 6월물을 매입하는 ‘롤오버’를 선택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날 WTI의 마이너스 가격이 극히 이례적인 일시적 현상이고, 올 하반기에 국제 유가는 배럴당 30달러 선을 유지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렇지만 국제 유가 마이너스 사태는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국제 경제의 현주소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라고 워싱턴포스트가 이날 지적했다.
국제 유가는 올해 초 배럴당 60달러가 넘었다. 그러나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여행 제한, 자택 대피령 등 각종 봉쇄 조치로 차량 운행이 줄고 항공 노선이 끊기면서 수요가 감소해 최근에는 배럴당 20달러 선으로 떨어졌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13개 회원국과 10개 비회원국 연합체인 OPEC+가 최근 하루 원유 생산량을 970만배럴 감산하기로 합의했으나, 이 대책이 유가 하락을 막기에는 역부족인 것으로 드러났다.
현재 주요 산유국이 하루에 약 1억배럴가량을 생산하고 있지만, 원유 소비 급감으로 인해 원유를 보관할 수 있는 저장시설 용량 부족 사태가 발생했다.
마이너스 유가의 후폭풍은 국내 경제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원유를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만큼 단기적으로는 물가 안정 등을 기대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세계 경기 침체에 따른 수요 둔화와 불확실성을 떠안을 수 있다.
코로나19로 세계 소비시장이 얼어붙은 상황에서 유가라는 또 다른 악재가 경기 침체를 더욱 부추겨 국내 수출경기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다.
워싱턴=국기연 특파원, 권구성 기자 ku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