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전 대통령이 1년여 만에 법정 출석을 위해 광주를 찾았으나 이번에도 광주시민들에게는 한마디 사죄의 말도 없었다.
그동안 전씨는 알츠하이머나 독감 등 건강 문제를 핑계로 재판에 나오지 않다가 법원이 구인장을 발부하자 작년 3월 마지못해 법정에 출석했다. 그때도 '발포 명령을 했느냐'는 취재진 질문에 '이거 왜 이래'라고 거칠게 화를 내서 국민의 분노만 유발했을 뿐 광주 시민들에 대한 사과는 한마디도 없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지금까지 재판에서 학생, 간호사, 성직자 등 20명이 5·18 당시 광주 시내 상공에서 헬기 기총소사를 직접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전남도청 건너편의 전일빌딩에서 발견된 270개의 탄흔이 발사각도 등으로 볼 때 헬기에서 발사된 총탄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정 결과도 나왔다.
광주에서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확인된 것이나 다름없다. 전일빌딩은 5·18 당시 전남도청 광장 등에서 쫓겨온 시민들이 몸을 숨겼던 곳이다.
그런데도 광주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성직자를 '거짓말쟁이'로 몰아세움으로써 자신으로 향하는 광주학살 책임의 화살을 피해 보려는 전씨는 그야말로 파렴치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 국민들의 대체적인 여론이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에 드러난 전씨의 뻔뻔한 행위도 어이없다. 치매의 일종인 알츠하이머 때문에 재판에도 못 나간다더니 지인들과 버젓이 골프를 치고 12·12 군사반란 주역들과 유명 중식당에서 호화 만찬을 하기까지 했다.
기총소사는 집단 발포 명령 책임자 문제와 함께 한국 현대사 최대의 비극으로 꼽히는 5·18 광주 민간인 학살의 진실을 밝히는 열쇠다. 전씨가 발포 명령을 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그가 측근을 통해 자위권 발동을 명령했고 그 이후 무차별 살상이 벌어졌다는 것까지는 이미 확인됐다.
심증은 가나 물증이 없을 뿐이지 의혹의 중심에는 늘 당시의 실권자였던 전씨가 자리했다. 전씨는 이것만으로도 광주시민에게 석고대죄하는 것이 마땅하다.
전씨가 5·18 희생자들과 광주 시민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한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다. 사과는커녕 부인 이순자씨는 그를 두고 대통령 단임제를 이룩한 '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치켜세우는 코미디를 연출하기도 해 국민들의 공분을 자아내기도 했다.
전두환(89) 전 대통령이 작년에 이어 올해 광주 재판에서도 재판 내내 꾸벅꾸벅 조는 모습을 보여 시민들의 공분을 샀다.
5·18 민주화운동 희생자 명예를 훼손한 혐의(사자명예훼손)로 기소된 전씨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당시 헬기 사격은 없었다"고 명확하게 표현하며 혐의를 부인했다.
재판은 이날 오후 1시57분부터 광주지법 201호 형사대법정에서 형사8단독 김정훈 부장판사 심리로 열렸다.
전씨는 청각 보조장치를 착용하고 재판에 참여했다.
그는 잘 들리느냐는 판사의 질문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고 부인 이순자씨의 도움을 받아 생년월일과 직업, 거주지 등을 확인하는 인정신문을 진행했다.
생년월일과 직업 등을 물을 때는 잘 안 들린다며 이씨에게서 1번 더 설명을 들었지만, 주소에 대해서는 맞는다고 답변했다.
인정신문을 마친 후부터는 눈을 감고 있다가 재판장이 검사의 공소사실을 인정하느냐고 묻자 눈을 뜨며 "내가 알고 있기로는 당시에 헬기에서 사격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혐의를 부인했다.
전씨는 "만약에 헬기에서 사격했더라면 많은 희생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무모한 헬기 사격을 대한민국의 아들인 헬기 사격수 중위나 대위가 하지 않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전두환, 팔짱 낀 채 눈 감았다 떴다 반복…재판 내내 꾸벅꾸벅 조는 모습
이후 팔짱을 낀 채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하며 잠을 이겨내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자신의 법률대리인인 정주교 변호사가 고(故) 조비오 신부의 5·18 기간 헬기 사격 목격 증언이 부당하다고 주장하며 영상·사진 자료를 제시할 때는 눈을 뜨고 유심히 화면을 바라보기도 했으나 고개를 가누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깨기를 반복했다.
재판장은 전씨 측에 고령인 관계로 집중력이 떨어지면 휴정을 요청하라고 했고 재판이 1시간 20분 이상 이어지자 변호인 측의 요청으로 잠시 휴정 후 재개하기로 했다.
전씨는 2017년 4월 펴낸 회고록에서 고(故) 조비오 신부의 헬기 사격 목격 증언이 거짓이라고 주장하며 조 신부를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한 혐의로 기소됐다.
전씨는 인정신문을 위해 지난해 한차례 재판에 출석한 이후 그동안 건강상의 이유로 불출석 사유서를 제출하고 출석하지 않았으나 재판장이 바뀌면서 공판 절차를 갱신하게 됐다.
◆양향자 “오늘 재판 끝나도 전두환은 광주에 사과하지 않을 것”
광주지역 정치권은 전씨의 법정 구속과 사죄를 촉구했다.
더불어민주당 광주시당은 이날 논평을 내고 "병환을 이유로 재판에 불출석한 전두환은 그동안 골프를 즐겼고, 쿠데타의 주역과 호화 오찬을 즐겼다"며 "또다시 광주를 모욕하고, 광주 시민을 우롱했으며 사법부를 기만했다"고 비판했다.
시당은 "수 없이 주어진 참회의 기회를 스스로 져버렸고, 인생 말년까지 이어진 노욕을 유감없이 증명하고 있다"며 "사법부는 파렴치한 범죄자 전두환을 즉각 구속해 사법 정의의 엄중함을 공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정의당 광주시당도 논평에서 "재판부는 전두환 측이 어떤 사유를 들더라도 불출석 사유를 더는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어 "전두환 씨와 학살 세력을 역사적 심판대에 올릴 수 있는 생물학적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전두환 씨가 광주 시민에게 머리 숙여 사죄할 것을 다시 한번 촉구한다"고 밝혔다.
민주당 양향자(광주 서구을) 당선인은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오늘 재판이 끝나도 전두환은 광주에 사과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광주의 아픔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사적 이익을 위해 오용하는 자들 또한 계속 생길 것이다"고 지적했다.
양 당선인은 "역사·법리·정치적 판단이 끝난 5·18에 대한 왜곡을 강력히 처벌하지 못하는 법의 미비 때문이다"며 "전두환처럼 역사를 부정하고 폄훼하는 자들을 바로 징역형에 처할 수 있는 법제화를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정의당 “재판부, 전두환 측이 어떤 사유 들어도 불출석사유 더는 인정해선 안돼”
이날 5·18단체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는 전씨에 대한 엄중한 처벌을 촉구했다.
5·18 3단체(유족회·부상자회·구속부상자회)는 이날 오후 광주지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5·18 역사 왜곡에 대한 사법부의 단호한 의지를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이들은 "대법원은 이미 전씨의 내란 및 내란 목적 살인죄를 인정하고 무기징역을 확정했다"며 "사법적 판단이 끝난 일이지만 여전히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역사와 진실을 부정·왜곡하는 전씨를 법정 구속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전씨는 자신의 회고록으로 고 조비오 신부는 물론 5·18민주유공자, 광주 시민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한 명백한 범죄를 저질렀다"며 "전씨의 역사·진실 왜곡은 일부 극우세력과 연결돼 있다는 점에서 일벌백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법원 정문 앞에서 차량이 통행하는 길을 따라 50m가량 늘어서서 '전두환은 5·18의 진실을 밝혀라' '5·18역사왜곡처벌법 제정하라' 등의 손팻말을 들었다.
5월 항쟁으로 자녀나 배우자를 잃은 오월 어머니회원들은 전씨가 출입한 법정 출입구 앞에서 5·18 상징곡인 '오월의 노래' 등을 부르며 전씨의 사죄를 요구했다.
5·18서포터즈를 자청한 시민단체 '오월잇다'도 이날 광주지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전씨는 5·18민중항쟁을 폭동이라는 거짓으로 내란 세력에 맞서 싸운 광주 시민과 민주화를 위해 몸 바친 모든 이들을 능욕했다"며 "왜곡 당하고 있는 역사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또 "전씨를 단죄하는 것이 민주화를 지켜낸 모든 영령과 광주시민의 한을 풀어줄 유일한 답"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전씨의 추악한 실태를 퍼트리고 그의 단죄를 위해 한마음 한뜻이 돼 투쟁할 것"이라며 "민주화 열사들의 희생과 맞바꾼 민주주의를 우리가 이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김현주 기자 hj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