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로 오랫동안 확장되던 세계화와 자유무역, 동맹, 국제기구, 다자간 협력, 자유로운 여행의 시대 등 이른바 ‘국제사회 공조’와 ‘국제 네트워크’가 무너지고 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지난 1일 기자회견을 통해 세계가 한몸으로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과 싸워야 하는데, 국제사회를 이끌어야 할 “지도자와 리더십이 결핍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어느 때보다 세계가 한데 뭉쳐야 하는 상황인데도 국제사회가 분열되어 있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지난 4일에는 코로나19 백신과 치료제 개발을 위해 40여개국이 자금 지원을 논의한 온라인 국제회의에 미국이 불참했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10억유로를 약속하고,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이 참석한 이 자리에 미국 등 주요국이 빠지면서 의미가 크게 퇴색했다.
지난 8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미국의 반대로 코로나19 대응 집중을 위한 전 세계적 휴전 결의안 채택도 무산됐다. 결의안 문구에 세계보건기구(WHO)가 들어가는 데 대해 미국이 끝내 반대한 탓이다. 결의안에 WHO를 거론하자고 한 중국을 저지하려는 행보로 분석된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 장관은 코로나19가 중국의 우한 바이러스 연구소와 연관 있다는 점을 연일 강조하면서 책임론을 강조했지만, 이에 반해 WHO는 관련된 어떠한 증거도 없고 추측에 불과하다고 일축한 바 있다. 미국과 WHO 간 균열이 점점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도 “우한 연구소 발원설은 냉전시대의 화석 같은 주장”이라며 미국에 크게 반발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EU 역시 국제적 공조보다 자체적인 독립 조사를 요구하는 결의안 채택을 예고하고 있어 지구촌의 균열은 더 빠르게 진행될 공산이 커졌다. 국제사회 전문가들은 EU가 표면적으로는 미국과 중국의 대립에 거리를 두면서 코로나19 위기를 이겨낼 방법을 찾겠다고 나섰지만, 전통적으로 지정학적 문제에 관여하지 않던 기존 입장에 반하는 만큼 이번 기회에 국제무대에서 존재감을 키우겠다는 의도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브렉시트(영국의 탈퇴) 후 무력해진 EU의 존재감을 다시 드러내겠다는 의미로 입을 모아 해석하기도 했다.
외신들은 구테흐스 사무총장이 “EU 집행위와 파트너 정부들이 이처럼 중요한 서약을 주최한 것에 감사하다"고 밝혔지만, 이번 코로나19 위기에서 아무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한 유엔의 역할에는 적지 않은 위기를 느끼고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남반구의 강국 호주 역시 코로나19 기원의 국제 조사를 주장하자고 나섰지만, 되레 중국의 모욕적 경고 발언에 연일 시달리며 국제사회에서 입지가 축소됐다. 중국 공산당의 기관지 인민일보 자매지인 관영 환구시보의 후시진 편집장은 지난달 27일 중국판 트위터 웨이보를 통해 “호주는 항상 소란을 피운다”며 질책한 바 있다. 아울러 “중국의 신발 밑에 붙은 씹던 껌처럼 느껴진다”며 “가끔 돌을 찾아 문질러줘야 한다”고 굉장히 모욕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로 미국이 보유한 강력한 국제사회 리더십은 현재 사분오열 상태다. 미국은 그동안 국제사회에서 독보적 리더십을 발휘해 ’미국 예외주의’를 인정받았지만, 이번 코로나19 위기에서는 최대 피해국이자 감염국으로 전락하면서 이러한 명성에 큰 흠집이 생겼다. 그 결과 그야말로 국제사회 네트워크는 붕괴 직전이다.
여기에 각국 경제의 버팀목이 되는 산업계 역시 초토화 상태다. 방역 모범국으로 칭찬받는 한국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코로나19 사태로 피해를 입은 기업 223곳을 대상으로 한 ‘인식 및 현황 조사’ 결과를 지난 10일 발표했는데, 응답 업체 대부분이 경제적 충격의 강도를 외환위기나 글로벌 금융위기 때보다 30%가량 크게 체감했다고 밝혔다.
지구촌의 몰락과 국제 질서의 붕괴는 글로벌 경제 위기의 시작을 예고한다. 어떤 국가나 지역협의체, 글로벌 기업도 지속성을 장담하기 힘든 시대가 됐다. 이 같은 흐름을 냉정히 파악하고 변화를 거듭하는 집단만이 생존을 담보할 수 있다는 의미다. 많은 국제사회 전문가들은 생존을 담보하지 않고 ‘현상유지’만을 목표로 삼는 집단은 당장 ‘내일’도 보장하기 힘들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바야흐로 ‘네트워크’가 사라지는 시대가 왔다.
김정훈 UN지원SDGs협회 사무대표 unsdgs@gmail.com
*UN지원SDGs협회는 유엔 경제사회이사회 특별협의지위 기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