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심리학/발터 슈미트/문항심/1만5000원
“사장님이 지금 당장 올라오랍니다!”
회사에 몸담은 이들이면 누구나 사장 비서실에서 걸려온 이런 전화를 받으면 긴장하기 마련이다. 특히 실적이 좋지 않은 영업사원이라면 이 호출에 기분이 바닥으로 떨어진 느낌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생기는 궁금증 하나! “사장님 방은 왜 ‘내려가지’ 않고 ‘올라가야’ 할까?”
잠자리도 안전 최우선의 원칙에 따라 위치가 결정된다. 독일 연구팀이 138명의 실험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디지털 속 가상 침실을 꾸미게 한 뒤 관찰했더니 대부분이 침대를 침실 문이 잘 보이는 위치에 놓았고 침실 문과 침대는 대각선을 이루도록 배치했다는 것이다. 이는 침입에 대비하려는 심리가 작용해서다. 자녀의 침대를 함께 배치하도록 했을 때는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왔다. 대부분 자신의 침대를 문 가까이 배치하고 자녀의 침대는 출입문에서 가장 먼 벽 쪽에 문과 대각선이 되는 곳에 두었다.
식당이나 비행기 좌석을 예약할 때는 대체로 창가 자리가 선호된다. 회사의 고위급일수록 바깥 풍경이 잘 보이는 사무실을 배정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창밖 풍경은 사물을 인식하는 범위를 넓혀주고 긴장을 풀어준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은 인간의 감정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생활 리듬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공간 심리에선 남녀 간에도 차이가 있다. 등산객을 보면 대개는 남성이 앞서고 여성은 몇 걸음 뒤처져 따라간다. 남성의 걸음걸이가 좀 더 빠른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진화심리학자는 남성이 목표지향적으로 걷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남성은 목표 지점에 일찍 도착하는 것이 우선이지만 여성에게는 목적지로 나아가는 과정이 곧 목적이라는 설명이다. 남녀의 이 같은 차이는 쇼핑할 때 잘 드러난다.
인간도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허락 없이 자신의 영역에 들어오는 타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물리적 ‘거리 두기’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인간의 본능이라 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신체에서 45~50㎝까지가 ‘밀접영역’, 50㎝∼1.2m까지가 ‘사적 영역’, 1.2∼3m 사이가 ‘사회적 영역’, 더 먼 거리인 3.5m 정도의 구간은 ‘공적 영역’으로 구분한다. 사회적 영역에서부터는 상대방의 동의가 필요하고, 사적 영역은 호감도를 가늠할 수 있는 거리다. 하지만 친한 사이라도 자칫 밀접영역에 함부로 침범했다가는 신고당할 수 있다.
저자는 “우리가 담장과 성을 쌓고 울타리를 치며 국경에 선을 긋는 일, 넘지 말아야 할 경계선을 그으며 남들도 이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적당한 거리에 대한 인간의 욕구가 반영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인간에게 ‘거리 두기’는 ‘더불어 살기’를 가능하게 해주는 필수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박태해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