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원격의료가 공론의 무대에 다시 등장했다. 물론 청와대와 더불어민주당이 원격의료를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것은 아니다'며 속도 조절에 나섰지만, 원격의료 필요성에 공감하고 도입을 긍정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청와대 입장이 확인되면서 10년간 헛돌던 원격의료 재추진이 가시화하는 분위기다.
원격의료는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0년부터 추진됐으나 의료 민영화나 대형병원 쏠림을 우려하는 정치권과 소규모 동네병원들의 반대로 벽에 부딪혔다. 21대 국회를 압도적으로 장악한 민주당의 대다수 의원도 지금까지는 원격의료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현행 의료법은 원격의료를 의료인 사이에서만 제한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그동안 정부는 정보통신기술(ICT)과 의료기술을 접목하는 원격의료 시행을 위해 의료법 개정을 추진했지만, 민주당은 의료산업 영리화가 우려된다며 반대해 왔다.
동네 의원들도 비대면 의료서비스가 시행되면 ICT 장비들이 집약된 대형병원으로 의료수요가 쏠리고 오진 우려도 있다며 반대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청와대가 원격의료 검토를 들고나온 배경에는 코로나19 사태의 경험에서 나온 자신감이 깔린 것 같다. 코로나19 사태의 초기에 한시적으로 허용한 전화상담 진료가 17만건에 달했는데도 우려하던 오진이나 대형병원 쏠림 현상은 없었다고 한다.
17만건이면 적지 않은 데이터다. 이를 꼼꼼히 분석하면 원격의료의 순기능과 부작용이 어느 정도 드러날 것이다. 이해관계자의 일방적인 주장보다는 과학적 빅데이터와 의료 수요자 관점에서 공론화가 시작돼야 한다.
다만 정치권과 의료계에서 우려하듯 국민건강보험 기반 의료 시스템 훼손과 의료 수혜 양극화 등으로 이어질 수 있어 정책 도입의 '입구'를 제대로 관리하는 것도 중요하다.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비대면 진료의 성과가 어느 정도 입증됐으니 어느 분야에서 어느 정도 수준으로 첫걸음을 떼고 보폭을 넓혀갈지 차분히 논의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청와대가 15일 비대면 진료 체계 구축을 공식화 한 것은 명칭 정리를 통해 소모적인 논쟁을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의료계 내부에서 오랜 논란이 된 '원격 의료'라는 명칭 사용을 통해 의료 영리화 논란으로 확산되는 것을 선제적으로 차단해 정면 돌파하겠다는 의도가 담긴 것으로 평가된다.
청와대 관계자는 15일 오후 춘추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정부는 환자와 의료진의 안전과 향후 예상되는 제2차 대유행에 대비하기 위해 비대면 진료 체계의 구축이 시급하다는 판단"이라며 "비대면 진료 체계 구축을 추진할 계획에 있다"고 말했다.
뉴시스에 따르면 결과적으로 김연명 청와대 사회수석이 지난 13일 더불어민주당 당선인들을 대상으로 열린 포럼 강연에서 원격의료에 대해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으로 논란이 촉발된 지 이틀만에 청와대가 공식 확인하는 형태로 정리한 셈이 됐다.
민주당 내부에서조차 청와대와 교감이 없었다는 식의 미온적 반응이 나오는 등 원격 의료 도입 여부를 둘러싸고 당청간 엇박자 논란이 일자 신속하게 차단하려는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청와대가 의지를 갖고 추진하는 정책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혀 혼선을 줄이겠다는 것이다.
◆靑, 비대면 진료 체계 구축 공식화…’명칭 정리’ 통해 소모적 논쟁 불식하려는 듯
여기에 의사협회 등에서는 원격 의료가 확대될 경우 '대면진료'라는 원칙이 깨질 수 있고, 충분한 인프라를 갖춘 대형 병원으로의 편중 현상이 심해지는 등 지금까지 지켜온 의료 공공성 가치가 훼손될 수 있다며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다.
대한의사협회는 이날 성명을 내고 "원격의료는 진료의 질을 담보할 수 없고 대면진료를 대체하지 못해 그 한계가 명확하다"며 "정부가 정작 당사자인 의료계를 패싱한 채 산업을 키우자고 안전을 내팽개치는 주객전도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비판적 입장을 밝혔다.
의협의 이러한 반응에는 정부가 공공성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의료계의 문제를 코로나19 대응을 명분 삼아 산업 발전 측면으로 방향타를 튼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 궁극적으로 깔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규제 개혁의 필요성을 이유로 현재 코로나19 진단을 위해 한시적으로 허용하고 있는 전화 진료의 범위와 폭을 넓혀 영리법인의 병원 설립까지 내주는 게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여기에 과거 민주당이 야당 시절 이명박·박근혜 정부 추진의 의료 영리화 시도를 비판했던 입장에서 미래통합당 공세에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명칭을 '비대면 진료'라는 개념을 사용한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정치권 공세 빌미 주지 않기 위해 ‘비대면 진료’ 개념 사용한 듯
실제로 참여정부에서 사회정책 수석을 지낸 김용익 현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은 지난 19대 국회의원 시절 과거 참여정부에서 추진했던 의료 영리화 정책의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한 바 있다.
김 이사장은 "참여정부에서 추진한 의료영리화 정책이 잘못된 것이었으며 당시 청와대 사회정책수석비서관이던 나에게 그에 대한 모든 책임이 있음을 밝히고 사과한다"고 했다. 당시 새누리당의 말바꾸기 비판에 고개를 숙인 것이다.
청와대가 원격 의료 대신 '비대면 진료'라는 명칭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것도 이러한 논란을 의식한 것으로 풀이된다.
청와대 관계자는 "지금 허용되고 있는 것은 원격 의료가 아니라 비대면 의료"라며 개념에서부터 차이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통상적으로 원격 의료에는 의료시설이 아닌 일반기업도 환자의 정보를 활용한 진료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지만 정부가 추진 중인 것은 그것과 무관하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 관계자가 "비대면 의료는 코로나19가 유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환자와 의료진의 안전한 진료 보장과 감염 우려로 인한 의료 접근성 저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지난 2월 전화 진료를 허용해서 시작된 것"이라며 추진 배경을 강조한 것도 확대 해석을 경계하는 차원으로 읽힌다.
신천지 발(發) 집단감염 사태 때 한시적으로 전화 진료를 허용해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점에서 정책 추진 판단이 출발했다는 것이다. 2차 대유행이 닥치기 전에 제도적으로 비대면 진료를 뒷받침해야 한다는 의미다.
정부가 한시적 전화 진료를 허용한 이래 지금까지 약 26만여 건의 진료가 이뤄졌고, 의료 접근성이 떨어지는 고령 내지는 고혈압과 당뇨 등 기저질환자를 진료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靑 “조심스러운 측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의료 공공성 강화 차원에서 접근”
청와대 관계자는 "비대면 의료는 현재까지 석 달 이상 운영되면서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데 중요한 성과를 냈다"며 "환자에게도 도움이 되고 의사, 의료진의 안전에도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또 "당초 대형병원에서만 (전화) 진료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다"면서 "동네 병원들까지 상당수 전화 진료를 했고, 여러 환자들이 이용했다"고 강조했다.
인프라가 잘 갖춰진 대형 병원 위주로 비대면 진료가 쏠릴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중소 병·의원급에서 활발하게 진료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영리화가 이뤄질 경우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에 따라 양극화 현상이 벌어질 것이라고 우려하는 의협 등의 반대 논리가 무색하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이와 관련해 다른 청와대 관계자는 뉴시스와 통화에서 "현재 원격 의료에 대해서는 의협에서 반대하고 있고, 또 대형병원과 그 외 수적으로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개인병원의 입장 차가 존재한다"면서 "상상력을 잘 발휘하면 (이해 관계에 있어) 절충점이 마련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현재 추진 중인 비대면 의료가 의료계 영리화 논쟁으로 번질 우려에 조심스러운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의료 공공성 강화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고 밝혔다.
◆의료계 “경제적인 목적으로 원격의료 추진돼선 안돼”
한편 이번 코로나19 사태로 비대면 진료를 포함한 넓은 범위에서의 원격의료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경제적인 비용, 효과성을 따져 원격의료를 도입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견지하고 있는 의료계와 달리 경제계에선 원격의료가 경제 전체에 가져올 수 있는 이익을 강조하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전 세계 원격의료 시장은 총 305억 달러(약 37조5000억원)다. 이 규모는 올해 355억 달러(약 43조6000억원), 내년 412억 달러(약 50조6000억원)까지 커질 것으로 추산된다. 이 예측대로라면 2015년부터 2021년까지 세계 원격의료 시장은 연평균 14.7% 성장하는 셈이다.
국내에선 원격의료가 허용되지 않고 있기에 관련 기술을 보유한 한국 기업들은 해외로 진출했다. 일례로 네이버의 자회사 '라인'(LINE)과 소니의 의료 전문 플랫폼 'M3'의 합작회사인 '라인헬스케어'는 지난해 12월부터 일본에서 원격의료 서비스를 시작했다. 일본 내 전 국민이 모바일 메신저인 라인을 활용해 내과·소아과·산부인과·정형외과·피부과 전문의와 상담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세계적으로 시장 성장세가 가파르지만, 기술을 보유한 한국 기업들이 정작 국내에서 사업을 전개하지 못하는 꽉 막힌 상황을 과감히 풀어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향후 이 같은 신종 전염병이 또다시 출현할 것에 대비하고 관련 시장 선점에 뒤늦게라도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다. 우리나라 의료법 제34조는 의료인과 의료인 사이의 원격의료만을 허용하고 있어 의사와 환자 간 원격의료는 원칙적으로 허용하지 않는다.
민간 경제 연구기관인 파이터치연구원은 '원격의료 서비스 규제 완화의 경제적 파급효과'라는 제목의 연구 보고서에서 관련 규제를 풀면 국내총생산(GDP)이 약 2조4000억원(0.15%) 증가할 것으로 추산했다. 소비는 무려 5조9000억원(0.58%) 규모로 불어날 것이란 예상이다.
약 4조3000억원(1.08%) 규모의 투자와 함께 2000개(0.01%)의 일자리도 창출될 것으로 연구원은 분석했다. 숙련 노동의 인적 투자량과 정보통신기술(ICT) 투자량, ICT 자본스톡 등이 각각 9.24%, 8.70%, 8.70%씩 증가하는 파급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규제 완화시 원격의료 서비스의 수가는 -5.46% 낮아지고 소비와 고용은 각각 6.70%, 5.16%씩 증가한다. 반면 기존의 대면 서비스의 경우 수가가 2.68% 오르고, 소비와 고용은 -2.56%, -3.31% 감소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그러나 두 서비스를 합한 전체 의료 서비스로 보면 수가가 -1.42% 줄고 소비가 1.88%, 고용이 0.18% 늘어난다는 점에서 총량적 측면에선 의료 서비스 시장에 긍정적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경제적인 목적으로 원격진료가 추진돼서는 안 된다는 논리로 의료계의 반발이 여전한 상황을 고려할 때, 급진적인 도입보다는 의료 서비스를 받는 국민의 편의가 즉각적으로 높아질 수 있는 분야부터 점진적으로 시도해 나가는 방향을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조언이 나온다.
김현주 기자 hj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