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지도부가 최근 공개된 고(故) 한만호씨의 옥중 비망록 내용을 계기로 검찰의 강압수사 의혹이 제기된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불법정치자금 수수 사건을 재조사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나섰다. 지난달 15일 제21대 국회의원선거(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뒤 여권의 대표적인 인사인 한 전 총리의 명예회복에 나선 모양새다. 한 전 총리는 대법원에서 2년형이 확정돼 복역한 뒤 만기출소했다.
민주당 김태년 원내대표는 20일 최고위원회의에서 한 전 총리의 뇌물수수 사건 핵심 인물인 한신건영 전 대표 한씨의 비망록 내용을 언급하며 “이 모든 정황은 한 전 총리가 검찰의 강압수사, 사법농단의 피해자임을 가리킨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원내대표는 “한 전 총리는 2년 간 옥고를 치르고 지금도 고통받는데, (재조사 없이) 넘어가면 안되고 그럴 수도 없다”며 이 사건의 재조사를 요구했다.
김 원내대표는 또 “검찰은 준 사람도, 받은 사람도 없는 뇌물 혐의를 씌워 한 사람의 인생을 무참하게 짓밟았다”며 “법무부와 검찰은 부처와 기관의 명예를, 법원은 사법부의 명예를 걸고 스스로 진실을 밝히는 일에 즉시 착수하길 바란다”고도 촉구했다. 같은 당 박주민 최고위원은 사법농단 수사 당시 공개된 문건에서 한 전 총리 사건이 언급된 것을 거론하며 재판거래 의혹을 밝혀야 한다고 했다.
앞서 한 전 총리는 2007년 열린우리당 대선후보 경선 비용 명목으로 한씨로부터 9억원을 받은 혐의(정치자금법 위반)로 2015년 대법원에서 징역 2년형이 확정됐다. 이명박정부 때인 2009년 말 별도의 뇌물수수 혐의로 한 전 총리에 대한 수사를 시작한 검찰은 이 사건 1심 선고를 하루 앞두고 한 전 총리에 대해 불법정치자금 수수 의혹을 추가로 제기하며 새로운 수사에 들어갔다.
한씨의 진술이 계기가 됐다. 2008년 한신건영 부도 후 사기죄 등으로 구속 수감돼 있던 한씨는 당시 검찰 조사에서 자신이 한 전 총리에게 9억원을 건넸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그는 한 전 총리의 1심 재판 과정에선 이런 진술을 번복했다.
한 전 총리는 1심에서는 무죄가 인정됐지만, 2심에선 한씨가 검찰 조사에서 했던 진술에 무게가 실리면서 실형을 선고받았다. 한 전 총리의 동생이 한씨가 발행한 1억원권 수표를 전세자금으로 사용한 점도 증거로 인정됐다. 대법원 역시 2심과 같은 판단을 내렸다. 검찰은 한씨가 회유를 받아 한 전 총리 재판에서 거짓 진술을 했다며 위증 혐의로 기소했다. 그는 대법원에서 징역 2년형이 확정됐다.
최근 일부 언론을 통해 공개된 한씨의 비망록에는 한씨가 검찰 수사 과정에서 한 전 총리에게 뇌물을 줬다고 진술을 했다가 법정에서 번복한 이유가 담겨있다. 여기엔 한씨가 추가 기소의 두려움과 사업 재기를 도와주겠다는 검찰의 약속 때문에 진술을 했었다고 적혀 있어 검찰의 강압수사 논란이 일었다.
이와 관련해 당시 수사에 참여했던 한 검찰 관계자는 언론에 “한씨의 비망록이라는 서류는 한 전 총리 재판 과정에서 증거로 제출돼 엄격한 사법적 판단을 받은 문건”이라면서 “법원은 1~3심에서 이 문건을 정식 증거로 채택했고, 대법원은 이 문건과 다른 증거를 종합해 유죄를 확정한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대해 민주당 박 최고위원은 “한씨의 비망록이 과연 엄격한 사법적 판단을 받았다고 100% 확신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한씨의 비망록을 둘러싼 의문이 분명히 해소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인터넷 기사 댓글란 등에서는 민주당 지도부의 이날 주장을 두고 “180석이면 유죄도 무죄로 바꿀 수 있느냐”는 등 비판적인 의견도 나오고 있다.
김주영 기자 bueno@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