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1년 5월30일 프랑스의 노르망디 지방 루앙의 비외 마르세 광장에서 화형을 받은 잔 다르크에 관한 글들은 읽을수록 더 머리가 헷갈린다.
우선 광장에서 수많은 사람이 보는 가운데 화형을 당했지만 그의 정체를 두고는 성녀 같다는 주장과 마녀 같다는 주장이 엇갈리는 식이다. 그러나 잔 다르크의 생애에서 종교적이거나 신비주의적인 부분을 접어둔 채 그의 생애를 세속적으로 살피면 의외로 명료하기도 하다.
잔 다르크의 화형을 동양식으로 풀이하자면 토사구팽(兎死狗烹)이란 말이 제격이다. 따라서 그의 삶은 한 나라의 통일에 결정적인 공을 세우고 토사구팽을 당한 한신(韓信)의 생애처럼 재미있는 서사시가 될 수도 있다. 잔 다르크의 공적은 한신의 그것보다 더 위대한 데가 있다. 한신이 중국 역사상 수없이 등장하는 그렇고 그런 제국을 세우기 위해 헌신했다면, 잔 다르크는 아예 ‘프랑스’나 ‘프랑스인’이라는 말을 확립한 셈이다.
바꾸어 말하면 잔 다르크 시대까지는 그런 말이 확립되지도 않았었다. 당시 영국은 침략국이라기보다는 오래전부터 프랑스에 눌러 살면서 프랑스 자체가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는 판이었다. 잔 다르크가 붙들린 것도 프랑스인의 나라이면서도 영국 편을 든 부르고뉴 공국의 군대에 의해서였다. 부르고뉴는 그를 영국에 팔았고, 이에 영국 편을 든 프랑스인 사제들이 종교재판에서 화형선고를 내린 것이다.
잔 다르크가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샤를 7세를 ‘프랑스 국왕’으로 자리 잡게 했으나 그에게 팽을 당한 것도 한신의 경우를 떠올리게 한다. 한신의 공이 너무 커서 유방은 그에게 부담과 위협을 느껴 그를 제거했듯이, 샤를 7세도 ‘성녀’를 자처한 잔 다르크에게 너무 부담과 위협을 느껴 그를 버린 것이다.
잔 다르크가 부르고뉴 군에 붙들린 데도 샤를 7세의 계략이 숨어 있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부르고뉴가 요구한 몸값을 지불하지 않아 영국에 팔려가도록 방조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