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송현도씨(국민대 4학년)는 언론계 취업을 준비 중이다. 언론계는 아직 입사과정에서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기술장벽’이 높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그는 지난해부터 파이썬(컴퓨터 언어의 한 종류)을 배우고 있다. 앞으로 살아가려면 컴퓨터 언어 하나쯤은 배워 둬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주변에는 인문계열이지만 코딩을 배워 이 분야 대학원으로 진학하려는 친구도 있다.
송씨는 “인공지능(AI) 기자의 등장이 결국엔 기자란 직업의 일자리를 줄일 것 같다”며 “아직 기술 수준이 낮다고는 해도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다”고 했다. 그는 ‘플랜 B’로 일반 사무직 취업을 준비 중이다.
한국교육개발원 교육통계센터의 ‘2019 학과계열별 입학정원’을 보면 인문계열 정원을 1이라고 봤을 때 공학계열은 그 두 배다. 사회계열도 두 배, 자연·의약·예체능이 인문계열과 비슷하다.
그런데 기업이 찾는 인재는 이 비율을 따르지 않는다. 인문계열 일자리가 1개 있을 때 공학계열은 32개, 사회계열은 8개, 자연계열 4개, 예체능계열 3개, 교육과 의약계열이 2개씩 올라온다. 세계일보가 3일 일자리포털 워크넷에 올라온 7만4972개의 채용공고를 선호 계열별로 나눈 결과다.
◆부작용만 남긴 학과구조조정
이런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단순히 생각하면, 대학이 너무 많은 인문계열 전공자를 배출하고 있거나, 공학계열 인재를 너무 적게 배출하는 것 같다. 어쩌면 만성화한 청년실업은 대학 학과만 손봐도 상당 부분 해결될지 모른다.
정부가 2018년까지 진행한 이른바 ‘대학 구조조정’은 이런 가정에서 출발했다. 2015년 교육부는 ‘교육개혁 촉진을 위한 대학 규제혁신 방안’을 발표하고, 사회수요 맞춤형 인재를 양성하겠다고 했다. 이때 등장한 게 ‘산업연계교육 활성화 선도대학(프라임) 사업’과 ‘대학 인문역량 강화(코어) 사업’이다.
프라임 사업은 대학이 미래사회 수요를 반영해 ‘전공 구조조정’ 계획을 내놓으면, 정부가 재정지원을 해주는 사업이다. 3년간 6000억원을 쏟아부어 ‘단군 이래 최대 대학 사업’이라 불렸다. 대학이 이 과실을 따먹기 위해선 취업률 낮은 학과를 통폐합해 정원을 줄여야 했다. 코어 사업도 기업이 원하는 실용적인 인재를 양성하는 구조로 인문학과를 개편하는 대학에 정부가 최대 40억원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결과적으로 구조조정은 실패했다. 대학가는 “자본과 시장논리에 대학을 예속시킨다”고 비판했고, 사업에 선정된 대학에서도 단기간에 학과를 통폐합하느라 해당 학과 교수는 물론 학생들의 거센 반발이 이어졌다. 결국 지난해 프라임과 코어, 대학자율역량강화(ACE+) 사업 등 5개 사업이 ‘대학혁신 지원사업’으로 통합됐고, 선정기준도 대학 자체 발전계획에 부합하는 사업을 지원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임은희 대학교육연구소 연구원은 “한국은 오랜 기간 사회·경제적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너도나도 대학을 갔고, 이 과정에서 기자재 없이도 인원을 늘릴 수 있는 인문계를 중심으로 정원이 늘어났다”며 “하지만 지금은 학령인구가 급감하고 있기 때문에 (무리한 정부주도의 구조조정보다는) 질적 미스매치를 어떻게 해결할지에 초점을 둬야 한다”고 했다. ‘1대 2’(인문:공학 대학정원)와 ‘1대 32’(인문:공학 채용공고)의 차이가 단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숫자의 문제는 아니라는 의미다.
◆10년 전에 멈춘 대학
“대졸자에게 기대하는 건 별로 없어요. 공대를 나왔다 하더라도 그들 머릿속에 있는 건 과목별로 조각난 지식이잖아요. 체계가 잡힌 큰 기업이야 몇 개월씩 신입사원 교육시킬 여력이 있겠지만, 저희 같은 시스템통합(SI) 업종에서 이런 곳은 20%도 안 될 겁니다. SI업체는 하루하루 고객사에 나가서 일하는 게 매출이니까, 어쩔 땐 사원을 뽑아도 (부서에서) 서로 안 받으려고 할 때도 있어요. 차라리 취업자 과정을 밟은 고졸사원이 더 나아요.”
기업 정보기술(IT) 관련 컨설팅을 하는 A사 김형진(가명) 대표는 “IT 인력난의 핵심은 ‘괜찮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라며 “요즘 대졸 신입사원을 뽑겠다는 곳은 별로 없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1대 2’와 ‘1대 32’가 단지 숫자의 문제라면 귀한 공대생을 너도나도 모셔갈 것 같지만 현실은 다르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지난 10여년간 대학의 질적 혁신이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여영준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최근 펴낸 ‘혁신성장 패러다임 전환을 위한 개혁 의제 연구’에서 우리나라 교육재정은 초중등(초등∼고등학교)과 고등(대학) 부문 사이에 비정상적으로 배분되고 있다고 말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의 학생 1인당 초중등 총교육비 대비 고등교육 총교육비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 대학에 들어가는 예산은 초중고 예산의 71%에 불과하다. 대부분 대학에 집중되는 각종 연구개발(R&D) 예산을 포함해도 89% 정도다. 33개 OECD 국가 중 꼴찌 기록이다. 만일 20조원에 달하는 한국의 초중고 사교육 시장까지 통계에 반영하면 대학 교육비의 비중은 더 내려갈 것으로 보인다.
김영철 서강대 교수는 ‘고등교육의 재정 위기’에서 “대학등록금이 2009년 정치권에서 공약한 ‘반값등록금’에 묶여 제자리인 현실에서 정부의 재정투입이 늘지 않아 교육경쟁력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2010년대 초 40위 안팎이었던 국제경영개발원(IMD) ‘대학교육지표(경쟁사회 요구 부합 정도)’ 순위는 지난해 55위로 떨어졌다. 세계경제포럼(WEF) 국가경쟁력 평가에서도 ‘고등교육 및 훈련’ 순위가 2011년 17위에서 2017년 25위로 내려앉았다. 그 이후 WEF의 평가지표가 바뀌어 단순비교는 어렵지만, 지난해 발간된 자료에서 ‘대졸자 기술역량’은 34위에 머물렀다. 지난 10년간 반값등록금과 정부의 빈약한 재정투자, 일방통행식 대학구조조정이 이어지면서 대학이 질적 도약을 할 기회를 놓친 것이다.
최경수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위원은 “융복합을 강조하는 4차산업에 걸맞게 학과 칸막이를 없애는 등 과감한 혁신이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별기획취재팀=안용성·윤지로·배민영 기자 kornyap@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