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깨고 다시 등장한 ‘어나니머스’… 트럼프 범죄 의혹 제기 [세계는 지금]

SNS 통해 시위대 강경 진압 ‘반기’ / 엡스타인 아동 밀매 조직 연루 문서 공개 / 미니애폴리스 경찰에 경고 영상 메시지 / “지난 20년간 무려 193명 살해했다” 주장 / 플로이드 사건 계기 활동 재개 본격화 / 미국 사회 혼란 틈타 대중의 흥미 촉발 / ‘스팸 계정’ 논란… 신뢰도 부족 분석도

해킹으로 정치적 의사를 표출해 온 얼굴 없는 국제 해커 조직 ‘어나니머스’(Anonymous)가 최근 수년간의 침묵을 깨고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달 25일(현지시간) 백인 경찰관에 의한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으로 미국 내 시위가 격화한 것을 계기로 활동 재개를 본격화한 모습이다. 어나니머스는 시위 지지 의사를 밝히면서 경찰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범죄 의혹 등을 제기하며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이 같은 내용이 짧은 시간에 대중의 흥미를 크게 촉발한 것에 비해 신뢰성이 다소 부족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미국 마이애미에서 '어나니머스'를 상징하는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쓴 남성이 조지 플루이드 사망 항의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마이애미=AP연합뉴스

어나니머스는 지난달 28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트럼프 대통령의 시위대 강경 진압에 반기를 들며 부패와 폭력에 맞서겠다고 밝혔다. 또한 ‘어나니머스가 미니애폴리스 경찰에 보내는 메시지’라는 영상에서 “미니애폴리스 경찰이 저지른 폭력과 부패에 대한 끔찍한 기록을 갖고 있으며, 경찰의 많은 범죄를 세상에 폭로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어나니머스는 “미니애폴리스 경찰이 지난 20년간 193명의 사람을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지난달 31일 하루 동안 미니애폴리스 경찰서 웹사이트가 마비되고, 시카고 경찰의 무전이 해킹돼 ‘엿 먹어라 경찰’이라는 곡이 재생되는 일도 일어났다. 한 유엔 기관 웹사이트에는 어나니머스 로고와 함께 RIP(Rest in Peace·평화롭게 잠들기를)를 패러디한 ‘Rest in Power, George Floyd’(조지 플로이드, 권력 속에 안식하기를)라는 문구가 뜨기도 했다. 이들 공격을 어나니머스가 주도했을 것이란 추측이 나왔지만 어나니머스는 이를 공식적으로 확인하지는 않았다.

코로나 검진 면봉 든 트럼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5일(현지시간) 메인주 길퍼드에 위치한 퓨리컬 메디컬사의 생산 공장을 둘러보던 중 코로나19 검진 등에 사용되는 의료용 면봉을 자신의 코에 대보려 하고 있다. 길퍼드=AP연합뉴스

경찰에 대한 강경한 메시지에 이어 1일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성범죄에 연루됐다는 내용이 담긴 문서도 공개했다. 이 문서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미성년자 성매매 혐의로 수감됐다 지난해 8월 자살한 억만자 제프리 엡스타인과 연관 있는 인물로 등장한다. 어나니머스는 “우리는 미국 정부와 인터폴에 트럼프 대통령을 조사할 것을 촉구한다”며 “엡스타인의 아동 밀매 조직에 트럼프 대통령이 활발히 개입했다”고 주장했다.

◆사회 혼란 틈타 재부상… 민심 훔치는 이유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피해를 채 복구하기 전 일어난 대규모 소요 사태는 어나니머스가 재등장하기 좋은 무대가 됐다. 트럼프 대통령 관련 의혹 등을 올리자마자 온라인에서 ‘어나니머스’는 어마어마한 검색량을 기록했다. 페이스북에서만 관련 영상이 8만5000회 이상 조회됐고, 트위터에서는 실시간 트렌드로 올랐다. 다만 음모론이 으레 그렇듯 정보의 사실관계 확인보다는 ‘믿거나 말거나’ 식으로 확산한 측면이 커 보인다.

미 경제매체 포브스는 3일 이에 대해 “당신이 어나니머스를 국제적인 정보 조직으로 보든 예전의 명성을 잃어버린 한심한 해커 집단으로 보든 중요치 않다”며 “어나니머스의 콘셉트는 관점에 따라 선이든 악이든 될 수 있는 목적을 위해 파괴력을 발휘하는 것이며, 이는 확실히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긴다”고 분석했다.



흑인 사망 항의 집회가 확산한 이래 어나니머스의 메인 트위터 계정으로 추정되는 계정(YourAnonNews)은 순식간에 수백만명의 새로운 팔로어를 얻었다. 8일 현재 이 계정은 761만이 넘는 팔로어를 보유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어나니머스가 조지 플로이드 시위와 같은 ‘실제 사건’을 이용해 대중의 주의를 빼앗아버리고, 조직의 영향력을 각인시키는 지점이다. 어나니머스를 연구해 온 가브리엘라 콜먼 맥길대학 교수(인류학)에 따르면 이번에도 어나니머스는 자신들의 메시지를 퍼뜨리기 위해 사회 혼란 속에서 가시화된 특정한 흐름에 올라타고 있다.

영국 BBC는 “어나니머스가 최근 주류 언론의 관심에서 멀어졌지만 현 미국 위기 상황에서는 먹혀드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뚜껑 열어보니 다소 힘 빠진 폭로?

트럼프 대통령 후보 시절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어나니머스는 지난달 15일 배상금 420만달러(약 50억원)를 요구하며 일주일 안에 입금되지 않으면 대통령의 “치부(dirty laundry)를 밝히겠다”고 압박했다. 이후 어나니머스는 트럼프 대통령이 과거 엡스타인과 함께 미성년자 성범죄에 활발히 가담했음을 폭로하는 문서를 공개했고, SNS 등에서 이는 큰 논란이 됐다.

그러나 이번 폭로에 대해 음모론 수준을 뛰어넘는 신뢰도를 확보하진 못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포브스는 이 폭로를 “스모킹 건(범죄의 확실한 증거)이라기보다는 기대에 못 미치는 김 빠진 이야기”라며 “아직까지 밝힌 수준으로는 트럼프의 치부를 드러냈다고 하기엔 힘들어 보인다”고 전했다.

특히 새롭게 알려진 또 다른 어나니머스 계정(AnonNewz)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점이 이러한 판단을 뒷받침한다. 포브스에 따르면 2017년 전 세계를 혼란에 빠뜨린 랜섬웨어(워너크라이)를 막아낸 천재 해커 마커스 허친스는 이 트위터 계정에 대한 심층 조사 끝에 해당 계정이 지난 1일 과거 게시물을 모두 삭제하고 시위 관련 내용을 올리기 시작한 ‘스팸 계정’이라고 밝혔다.

미국 미니애폴리스 경찰서장 메다리아 애러돈도(오른쪽)가 4일(현지시간) 백인 경찰의 가혹행위로 숨진 흑인 조지 플로이드의 관이 실린 운구차량이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의 추모식장에 도착하자 무릎을 꿇고 있다. 미니애폴리스 AFP=연합뉴스

결국 이 계정은 3일 “스팸성 계정들과 연관성이 있다”는 이유로 삭제 조치됐다고 트위터 대변인은 밝혔다. 진짜 어나니머스와 관계 없는 사칭일 가능성에 대해 트위터 측은 “잘 정돈된 진짜 어나니머스 계정 활동이라 볼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다”며 “어나니머스처럼 보이게 하려고 프로필 이름과 사진 등을 바꾸고, 팔로어를 늘리려는 시도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를 단정할 수 없다는 의견도 있다. 콜먼 교수는 올해 재등장한 어나니머스 활동에 기존 어나니머스 해커들이 개입한 정황도 보인다고 한 외신에 밝혔다.

어나니머스가 미니애폴리스 경찰서 웹페이지를 해킹해 유출했다고 주장한 소속 경찰관들의 이메일도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노출된 이메일 800여개 중 대부분이 개인정보 침해 여부를 확인해주는 보안 업체 ‘해브 아이 빈 폰드(HIBP)’ 데이터베이스에 있는 것들과 일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HIBP 운영자 트로이 헌트는 이를 근거로 어나니머스 주장의 신빙성에 의문을 표했다. 이미 온라인에 떠도는 정보를 수집했을 뿐 미니애폴리스 경찰이나 시 당국과 연관된 이메일로 볼 단서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진짜든 사칭이든 이번 어나니머스의 활동은 “그 어떤 정보기술(IT) 시스템보다도 우리의 정신(mind)과 주의(attention)를 해킹했다”고 포브스는 지적했다.

 

■컴퓨터 해킹 투쟁 수단… 익명의 ‘해커 활동가’

 

어나니머스(Anonymous)는 컴퓨터 해킹을 투쟁 수단으로 사용하는 새로운 형태의 행동주의자들이다. 각국 정부의 부정부패, 인터넷 검열, 종교비리, 증오단체, 테러집단, 공권력 남용 등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정치 활동을 펼쳐왔다. ‘해커 활동가’(hacktivist·hacking과 activist의 합성어)로 간주되는 이들은 ‘익명’이라는 집단명처럼 전 세계에 점 조직 형태로 퍼져 있다고 알려져 있다.

 

2000년대 초반 미국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시작된 이들의 활동은 사욕을 채우거나 사기 행각을 벌이는 블랙 해커와 달리 표현의 자유, 사회 정의를 추구하며 부패와 폭력에 저항하는 ‘이유 있는 해킹’을 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최근 활동으로는 2017년 전 세계의 약 1만여개 아동 포르노 사이트를 강제 폐쇄하고, 사이트 이용자의 개인 정보 등을 공개한 일이 있다. 2015년에는 파리 테러의 주범인 이슬람국가(IS)로 추정되는 트위터 계정 약 5000개를 해킹해 차단시키고, IS 대원들의 주소를 공개했다. 백인 우월주의 집단(KKK)의 신상을 온라인에 폭로하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대해서도 지난 대선 때부터 인종차별 등을 이유로 맹비난을 이어오고 있다. 국내에서는 2013년 4월 북한의 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를 해킹해 가입자 1만5000여명의 정보를 공개해 주목받았다.

 

점점 국제사회에서도 영향력을 인정받는 해커 조직으로 자리매김한 어나니머스는 미 시사주간지 타임에 의해 ‘2011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100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이들의 상징은 가이 포크스 가면이다. 포크스는 가톨릭 탄압에 항의해 1605년 영국 국회의사당을 폭파하려다 처형당한 인물로, 영화 ‘브이 포 벤데타’의 소재가 되면서 저항의 상징으로 대중에게도 잘 알려졌다.

 

정지혜 기자 wisdom@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