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2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2주년을 맞아 북한은 “힘을 키우겠다”며 군사력 증강에 방점을 찍었다. 반면 한국 외교부와 통일부는 일제히 “한반도 평화”를 강조하며 북한을 달래고 어르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일각에선 제2차 세계대전 직전 영국·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취한 ‘유화정책’이 떠오른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대북전단 살포와 관련해 남북 간 고조된 긴장 속에서 북한은 12일 리선권 외무상 명의의 담화를 내고 “미국의 장기적 군사적 위협을 관리하기 위해 힘을 키우겠다”고 밝혔다. 리 외무상은 싱가포르 회담 당시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이었다.
그는 미국을 겨냥해 “우리 최고지도부와 미국 대통령과의 친분 관계가 유지된다고 해서 실제 조·미(북·미) 관계가 나아진 것은 하나도 없는데 싱가포르에서 악수한 손을 계속 잡고 있을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오는 11월 대선을 앞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율이 최근 뚝 떨어진 점을 감안한 듯 “더는 대가 없이 치적 선전을 위한 보따리를 던져주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북한에 대한 유엔 등 국제사회와 미국의 제재를 먼저 풀지 않는 한 북한도 비핵화 등 선물을 미국 측에 안길 의향이 없다는 뜻이다. ‘선(先) 제재 완화, 후(後) 비핵화’라는 북한의 방침을 명시한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만약 미국이 ‘대가’를 내놓지 않으면 핵실험 재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 거의 완성 단계인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시험발사 등으로 미국을 위협해 트럼프 대통령을 낙선시키겠다는 의도인 셈이다.
이처럼 북한은 ‘무력’에 방점을 찍었으나 우리 정부는 여전히 ‘평화’ 타령만 거듭했다. 외교부는 이날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노력은 계속돼야 한다”며 “정부는 북·미대화의 조속한 재개와 남북관계의 발전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통일부도 “한반도 평화와 번영을 위해 노력해 나가겠다”는 짧은 입장만 내놓았다. 그러면서 대북전단 살포행위에 대해선 “엄정하게 대응할 것”이란 종전의 단호한 방침을 재확인했다.
이를 두고 2차대전 직전 서유럽 정세가 떠오른다는 의견이 많다.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은 전쟁 준비를 착착 진행했다. 오스트리아와 합병하고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한 데 이어 폴란드를 칠 준비를 했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평화가 중요하다”며 이를 바라보기만 했다.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 총리는 히틀러와 정상회담을 가진 뒤 “영·독 양국이 유럽의 평화에 합의했다”며 영국인을 향해 자랑하기도 했다. 이른바 유화정책이다. 하지만 히틀러는 1939년 기습적으로 폴란드를 침략, 2차대전을 일으켰고 체임벌린은 ‘역대 최악의 무능하고 유약한 지도자’란 혹평 속에 윈스턴 처칠한테 총리 자리를 내주고 정계를 떠나야 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