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전 세계 스포츠 경기가 대부분 멈춰서면서 한국 프로야구의 무관중 경기가 인기를 끌고 있다. 얼마 전 ESPN이 중계한 두산과 NC의 KBO리그 경기에서 두산 투수 유희관의 ‘아리랑볼’이 주목받았다. 전광판에 찍힌 시속 77㎞ 커브에 중계진은 “포티 나인(49마일)”을 연발했다. 중계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방망이를 쥐고 “나도 칠 수 있겠다”며 포즈를 취했다. 구속이 느리다지만 얕봐서는 안 된다. 유희관의 주자 견제나 송구는 어느 투수보다 빠르고 정확하다. 느린 볼로도 최근 4년간 국내 투수 가운데 최다승을 거뒀다.
언제부터인지 외국인에게 비친 한국인의 인상은 급하다는 것이다. 외국인이 한국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말이 ‘빨리빨리’라고 한다. 이런 문화는 한국전쟁 이후 고도 경제성장의 기폭제였다. 바쁜 직장인들을 위한 인스턴트 식품과 패스트푸드가 넘쳐난다. IT(정보기술) 강국답게 인터넷 속도도 다른 나라에 비해 빠르다.
하지만 한국의 전통에는 ‘느림의 미학’이 깔려 있다. 천천히 데워지는 온돌방과 발효 음식의 끝판왕인 된장·김치 등이 대표적이다. 성장과 결과만 앞세운 조급함은 실수와 시행착오를 가져온다. 나아가 잘못을 고치려는 합리적 사고를 가로막는다. 압축성장의 이면에 드러난 폐해는 매사를 대충대충 넘어가려는 ‘적당주의’와 빈부 격차다.
야구에서 빠른 공만 가진 투수는 살아남기 힘들다. ‘위닝 샷’으로 강속구만한 게 없지만, 상대의 허점을 파고들어 타이밍을 빼앗는 느린 볼도 필요하다.
남북관계도 마찬가지다. 북한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의 ‘대북전단 비난 담화’ 이후 판문점선언의 성과물인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는 데 열흘밖에 걸리지 않았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는 한 완전한 평화는 없다. 대북전단을 막는 것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정부는 ‘핵’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남북관계의 결과물에만 매달리는 조급함이 우리 내부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건 아닐까. 섣부른 낙관은 북한의 오판을 부른다. 대북 저자세에서 벗어나 안보태세를 굳건히 하면서 북한의 변화를 기다리는 느긋함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