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병 뒤덮은 뉴욕의 거리… 기댈 것은 사랑뿐이더라

9년 만에 돌아온 뮤지컬 ‘렌트’ / 현실과 타협 않는 예술가 이야기 / 불꽃같은 삶 살아가는 청춘 그려 / 주옥같은 노래들로 가득 찬 공연 / 동시대성 덧씌워져 공감력 부여 / 오종혁·아이비 등 베스트 출연진 / 개막공연서 최고의 기량 선보여
젊은 예술가들의 치열한 삶과 사랑을 무대에 올린 뮤지컬 ‘렌트’. “사랑을, 사랑을 기억해야 해요. 사랑은 하늘이 주신 선물이기에, 사랑을 나누고, 사랑을 받고, 다시 사랑을 나눠요. 당신의 삶을 사랑으로 재어 보아요”라고 노래한다. 신시컴퍼니 제공

100여년 전 전쟁과 굶주림이 지배하던 시절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천사의 물음에 러시아 문호 톨스토이는 ‘사랑’이라고 답했다. 9년 만에 우리나라에 돌아온 뮤지컬 ‘렌트’에선 역병(疫病)의 공포가 뒤덮은 뉴욕 길거리 음악가 엔젤이 같은 질문에 다시 답한다. 역시 사랑뿐이라고.

 

불꽃 같은 삶 끝에 ‘틱틱붐’과 ‘렌트’ 단 두 편의 작품을 남기고 요절한 천재 작곡가 조너선 라슨의 문제작 ‘렌트’는 이제는 한 세대 전 이야기가 된 1990년대 뉴욕 젊은 예술가 이야기다. 사랑과 우정, 그리고 현실에 타협하지 않는 예술가의 이상과 실패에 굴하지 않는 삶을 그리고 있다. 그 끝은 허망한 재가 될지라도 한 점 후회 없이 타오르는 불꽃 같은 인생을 택한 젊은이들이 주인공이다.

 

1996년 1월 뉴욕 작은 소극장에서 초연된 이 작품이 대성공을 거두며 긴 생명력을 지닌 명작이 된 첫째 이유는 역시 음악이다. 가장 유명한 ‘시즌즈 오브 러브’뿐만 아니라 ‘원 송 글로리’, ‘라이트 마이 캔들’, ‘투데이4유’, ‘탱고 모린’, ‘산타 페’, ‘아윌 커버 유’, ‘라 비 보엠’ 등 주옥같은 노래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브로드웨이에서 젊은층을 끌어들여 흥행에 성공한 첫 록 뮤지컬이란 평판을 듣는다. 록은 물론 리듬 앤드 블루스·탱고·발라드에 심지어 가스펠까지 다양한 장르에 강한 중독성을 가진 노래들이 송스루 뮤지컬답게 끊이지 않고 흐른다. 5인조 밴드는 무대 전면 왼쪽에 자리 잡아 록 뮤지컬로서 정체성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좋은 노래에 공감력을 부여하는 건 ‘렌트’의 동시대성이다. 다른 뮤지컬과 달리 ‘렌트’는 영웅도 악당도 없고, 음모도 복수도 없다. 그저 온몸으로 꿈을 향해 몸을 던지고 후회 없이 사랑하다 이별하는 보통 젊은이들 이야기다. 월세 낼 처지도 못 돼 사는 곳에는 전기도 자주 끊기고 추운 겨울에는 난방도 안 된다. 초 한 자루에 불을 밝혀 온기를 지켜야 한다. 하지만 친구들과 모여 살 수 있던 정든 곳에서 개발업자에 등 떠밀려 쫓겨날 처지가 되자 문화시위로 개발에 저항한다. 1990년대 뉴욕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지만 사회 불평등과 기성체제에 저항하는 지금 우리나라 젊은이들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극을 이끄는 건 세 커플 사랑 이야기다. 아직 기회를 잡지 못한 음악가 로저와 밤거리를 방황하는 클럽 댄서 미미, 그리고 기성체제를 부정하는 천재 프로그래머 콜린과 이름처럼 천사 같은 성품의 엔젤, 이들을 돕는 공익변호사 조앤과 전위예술가 모린이 주인공이다. 모두 1990년대 서구사회를 집어삼킨 후천성면역결핍증(에이즈)의 어둠에 사로잡힌 상태다. ‘돈맛’을 보여주겠다는 방송계 스카우트 제안을 거부하고 다큐멘터리로 이들 삶을 기록하는 마크만이 온전하나 그 역시 친구들이 모두 죽고 자기 혼자 남을까 두려워하는 삶을 살고 있다. 

제각각인 성 정체성에 서로 얽히고설킨 연애 관계와 에이즈·동성애·약물 등 파격적인 소재는 자칫 공감은커녕 거부감을 일으키기 충분하다. 이들 처지에 공감하고 응원하는 마음이 생기게 하는 것은 배우들 몫이다. 이 때문에 개성 강한 배역과 좋은 노래를 지닌 ‘렌트’는 스타 등용문으로 유명하다. 최정원, 남경주, 조승우, 전수경, 윤공주 등이 활약했고 김선영, 정선아, 김호영, 송용진, 최재림, 이건명 등이 빛을 봤다. 이번 공연에선 ‘다른 작품 3회 이상 출연’이란 문턱을 뒀는데도 1300여명이 오디션에 응모했을 정도다.

 

그 결과 로저 역에 오종혁·장지후, 마크 역에 정원영·배두훈, 미미 역에 아이비·김수하, 엔젤 역에 김호영·김지휘, 콜린 역에 최재림·유효진, 모린 역에 전나영·민경아, 조앤 역에 정다희, 베니 역에 임정모 등 국내 뮤지컬에서 활동하는 이들 중 베스트 출연진이 구성됐다.

 

오종혁과 아이비가 로저와 미미로 무대에 오른 지난 13일 개막 공연은 역시 좁은 문을 통과한 출연진이 최고 기량을 갖췄음을 충분히 보여줬다. 특히 2009년과 2002년 각각 콜린과 엔젤로 뮤지컬에 데뷔한 최재림과 김호영은 이번 무대에서 다시 왕년 배역을 맡아 오랫동안 기억될 연기와 노래를 보여줬다. 김호영이 ‘투데이4유’를, 최재림이 ‘아 윌 커버 유’를 부르는 장면은 ‘렌트’가 지닌 매력의 최고점이었다. 김호영은 빛나는 조명 아래서만이 아니라 퇴장을 위해 188㎝ 장신인 최재림 손을 잡고 폴짝폴짝 무대 뒤로 뛰어나가는 순간까지 거리의 천사로서 열연했다.

네덜란드에서 온 이방인에서 국내 뮤지컬 배우로 거듭나고 있는 전나영도 이날 공연에서 밝게 빛났다. 전위예술가 모린을 맡아 극 중 극 형식으로 펼쳐지는 난도 높은 ‘오버 더 문’ 퍼포먼스를 완벽하게 소화했다.

 

인생이 화려하게 피어나기 직전 숨진 ‘렌트’의 아버지 조너선 라슨은 푸치니의 비극 ‘라 보엠’을 원작으로 삼은 이 작품에서 결말은 여주인공의 죽음 대신 부활을 택했다. 젊은 죽음에 대한 슬픔과 공포가 넘쳐나던 당대 청춘을 위한 선택이었을 듯하다. 극 중 에이즈 환자 모임에 참석한 젊은이들은 “두려워하지 마, 삶을 놓치지 마”라고 노래한다. 실제 조너선 라슨의 친구를 모델로 한 고든은 이렇게 답한다. “뉴욕에 살면 두려움은… 삶이죠. 지쳐요. 헛된 희망의 말들, 항상 현실적으로 살아왔으니. 하지만 노력할게요, 맘을 열고서….”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렌트’가 보내는 메시지다. 서울 신도림 디큐브아트센터에서 8월 23일까지.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