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중국 공산당을 그냥 두고는 한국도 아시아도 세계도 평화는 없다”

1948년 7월 20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73세의 이승만이 나흘 후 취임식에 앞서 환담하고 있다. 제헌국회에서 간선으로 치러진 선거에서 김구(불참)와 경합한 이승만은 재적 198명 중 196명이 출석한 가운데 180대 13으로 승리했다.

“민족 총궐기의 때가 왔다. 궐기하라”, “통일이 아니면 죽음을”, “임기 중 반드시 직선제 개헌을”, “통제야 물러가라”, “독도 등대 불 켜라”, “죽일 테면 죽여라.” 얼핏 들으면 좌파나 진보 진영의 구호 같은 이런 발언과 주장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의외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다. 3·1운동 촉발, 통일 미루는 휴전회담 반대, 민주화 진척, 자유시장경제 안착, 독도 영유권 확립,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등 그는 대한민국 역사의 결정적 시기마다 목숨을 건 결단 끝에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

 

그동안 안 알려졌거나 잘못 알려져 오해와 곡해로 매도당하고 있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1875∼1965)의 새로운 면을 다룬 ‘이승만 현대사: 위대한 3년 1952~1954’가 출간됐다. 필자는 4·19 당시 대학생으로 경무대(현 청와대) 앞에서 이승만 하야 시위에 앞장섰던 4·19세대다. 언론인 출신인 필자는 “뒤늦게 이승만을 공부하고 비로소 알게 된 나 같은 사람에게 회한이 있다. 그건 바로, ‘알고나 욕할 걸’”이라며 “늦게라도 아는 것이 끝내 모르고 죽는 것보다 낫다. 그는 독재자가 아니었다”는 결론이다.

 

저자는 “우리는 왜 대통령 이승만을 말하기 꺼려하는가”하고 묻고, “독재자라고 잘못 배웠기 때문이다. 부정선거로 쫓겨난 대통령이라고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러면서 그 답을 책에 펼쳐놓는다. 저자는 ‘이승만 현대사: 위대한 3년’은 자유 대한민국의 초석을 놓은 1945~1948년의 ‘건국혁명 3년’이 앞서 있었고, 1952~1954년은 ‘두 번째 위대한 3년“이라고 평가한다. 그동안 역사에서 부정적으로만 접했던 1952년의 ‘부산 정치파동(1차 개헌)’과 1954년의 ‘사사오입 개헌 파동(2차 개헌)’을 그는 ‘파동’이 아닌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자유시장경제·국민투표 개헌’으로 고쳐 불러야한다고 제안한다.

 

유신헌법 15년 이후 자칭 민주화세력이 그토록 갈구한 대통령 직선제를 이승만은 전쟁 와중인 1952년 도입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지구촌 유일의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을 가능케 한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1954년 도입했다. 즉, 1948년의 대한민국 건국을 ‘미완의 건국’으로 규정한 저자는 두 번째 위대한 3년을 거치고서야 대한민국은 ‘나라 국(國), 집 가(家), 국가집’으로 온전히 완성되었다고 본다.

 

1954년 7월 28일 미국 의회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하는 이승만 전 대통령. 기립박수를 포함해 서른세 차례나 박수가 쏟아졌다. 닷새 뒤 이승만은 뉴욕 브로드웨이의 ‘영웅거리(Canyon of Heroes)’에서 퍼레이드까지 벌였다.

저자는 이승만의 한 세기 이상 앞선 생각과 실천을 정리한 후 “전율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는가?”하고 묻는다. 특히 권력의 단맛에 빠진 386 출신들이 걸핏하면 내세우는 직접민주정치 제도를 그들이 그토록 비난하는 이승만이 처음 도입했다는 사실 앞에 솔직해 질 것을 요구한다.

 

1953년 이승만의 고집과 책략으로 체결된 한미동맹의 가치는 다른 모든 업적을 더한 것보다 위대하다. 6·25 이후 소련과 중국을 등에 업은 북한의 무수한 도발과 남침 야욕을 무력화시킨 것도 한미동맹의 위력이다. 저자는 이에 대해 “나라 집의 자유민주와 자유경제를 지켜 줄 철벽 담장을 쌓았다. 한국에 영토적 야심이 없는 기독교 자유국가 중 최강의 미국을 붙잡아 목숨을 걸고 한미동맹을 체결하여 북한·중국·러시아의 북방 침략도 일본의 남방 침략도 없어졌다”고 상찬한다. 누가 이의를 제기하랴.

 

인보길의 ‘이승만 현대사: 위대한 3년 1952~1954’ 표지.

책의 압권은 이승만을 부정적 이미지투성이로 만든 4·19를 정반대로 평가하는 부분이다. 저자는 4·19가 이승만이 한평생 그토록 꿈꾸던 ‘똑똑한 국민 만들기’의 완성, 즉 “이승만 최후의 성공작”이라는 과감한 해석을 내놓는다. 그 근거로 1960년 4월 23일 부상 학생들이 입원해 있는 병원을 찾아 얼싸안고 눈물을 흘린 일, 일주일 만인 4월 26일 자진 하야로 피해를 최소화한 일, 하야 후 대만 장제스 총통의 위로 편지에 “나는 위로받을 이유가 한 가지도 없소. 불의를 보고 일어서는 똑똑한 젊은이들과 국민을 얻었으니 이제 죽어도 한이 없소”라고 답한 일 등을 꼽았다. 뿐만 아니라 4·19 일주일 전 선거부정이 있었음을 늦게나마 알아차린 이승만이 자진 하야를 먼저 거론하기 시작했다는 4월 12일 국무회의 기록도 ‘쫓겨난 독재자 이승만’에 덧씌워진 허상을 단번에 씻겨준다.

 

국제정치 전문가 이승만의 진가는 그의 탁월한 정세 안목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이승만은 벌써 반세기 훨씬 전에 “우리는 절반은 공산주의, 절반은 민주주의 상태의 세계에서는 평화가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중국 공산당을 그냥 두고는 한국도 아시아도 세계도 평화는 없다. 여러분의 중대한 결정이 지금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예언 같은 그의 예측은 지금 정확히 들어맞고 있다.

 

조정진 기자 jjj@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