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멈춰버린 박원순의 꿈

“도시의 가장자리로 밀려났던 많은 시민들의 삶과 꿈을 회복시키는 데 집중했습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지난 6일 민선 7기 2주년 기자간담회에서 밝혔듯 반평생을 인간의 존엄과 사회적 약자 보호를 위해 헌신했다. 1980년대에는 인권변호사로서 ‘부천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 굵직한 사건을 변호했고 1990년대에는 참여연대 설립을 주도하며 시민사회의 권력과 자본 감시에 앞장섰다. 2000년 들어서는 아름다운재단과 희망제작소를 통해 지속가능한 시민사회 만들기에 본격 나섰다.

 

1956년 경남 창녕군에서 태어난 박 시장은 경기고등학교 졸업 후 1년 뒤인 1975년 서울대 사회계열에 입학했다. 1학년 재학 중 유신체제 반대 학생운동을 하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되면서 제적됐다. 이후 단국대 사학과를 졸업한 뒤 1980년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1982년 대구지방검찰청 검사로 임용됐지만 6개월 만에 사표를 내고 이듬해 변호사로 개업했다.

 

그는 정계 입문 전 주요 시국 사건 변호를 맡은 대표적 인권변호사였다. 조영래 변호사 등과 1985년 경기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피해자인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변호인단에 참여하면서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이후 ‘보도지침 사건’과 ‘구로동맹파업사건’,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서울대 우 조교 성희롱 사건’ 등 굵직한 시국·인권 사건 변론에 참여했다. 1988년 결성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에는 학술간사로 활동했다.

 

1994년에는 진보성향 시민단체의 대표 격인 참여연대 결성을 주도했다. 2002년까지 사무처장과 상임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시민운동을 이끌었다. 참여연대는 이후 부정부패 척결을 위한 맑은 사회 만들기 운동, 재벌개혁을 위한 소액주주 운동, 부패 정치인 낙천낙선 운동, 이라크 파병 반대운동을 주도했다. 

 

참여연대가 대표 시민단체로 자리매김하자 2000년엔 1% 나눔운동을 위한 ‘아름다운 재단’을 만들고 2년 뒤엔 중고 생활용품을 기증받아 시민들이 공유하는 개념의 ‘아름다운 가게’를 설립했다. 2006년에는 시민들의 아이디어를 현실화하는 ‘희망제작소’를 세워 시민단체의 활동영역을 권력·자본 감시에서 대안사회 제시로까지 넓혔다.

 

그는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중도 사퇴로 치러진 2011년 서울시장 재보선에 출마하면서 정치권에 뛰어들었다. 안철수 당시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양보’로 야권 단일후보가 된 박 시장은 당시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를 53.4% 대 46.2%로 꺾었다. 이어 내리 당선돼 사상 첫 3선 서울시장에 등극했다.

 

박 시장은 재선 때인 2015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가 터졌을 때 “늑장대응보다는 과잉대응이 낫다”며 과감한 방역조치로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다. 이를 기반으로 2017년 19대 대선 더불어민주당 경선에 뛰어들었으나 유의미한 지지도를 얻지 못한 채 물러났다. 

 

박 시장은 차기 대선에 대한 강한 도전 의욕을 드러냈으나 이낙연 전 국무총리의 20%대 지지율을 뒤쫓아가는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달리 지지율 답보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송민섭 기자 stsong@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