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7월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군과 일본군 사이의 격전이 벌어졌다. 임진왜란 시작과 함께 파죽지세로 북진을 거듭한 일본군은 1592년 6월 평양성을 점령하고, 후속 부대의 지원을 기다렸다.
그러나 바닷길을 장악한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그 목적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급해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수군의 해상 공격을 독려했고,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7월 6일 70여척의 군선을 이끌고 견내량에 도착했다. 이순신은 견내량 바깥 바다에 머무르며 지형을 살폈다. 포구가 좁아 판옥선이 서로 부딪칠 위험이 있고, 적이 육지로 도망칠 수 있는 곳임을 파악한 이순신은 한산도 앞 넓은 바다로 일본 군선을 유인했다. 7월 8일 판옥선 5척을 뒤쫓아 일본 군선이 추격해왔다. 공격 기회를 기다리던 이순신 함대는 학의 날개형으로 커다란 원을 그리는 전투대형인 학익진(鶴翼陣) 전술을 썼다. 적의 함대가 날개 안으로 들어오면, 적을 둘러싸고 총포를 쏘아 댔다. 거북선 2척이 적의 함대를 뚫고 돌진하였고, 판옥선들은 적의 배를 들이받으며 공격을 펼쳤다. 이날 일본 군선 73척 중 66척이나 침몰이 되었지만, 조선 수군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이 전투가 바로 세계해전사에도 그 이름이 빛나는 한산도 대첩이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일본은 본시 수륙이 합세하여 서쪽으로 공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 해전으로 인하여 한쪽 팔이 끊어져 버린 것처럼 되었다 … 조선군은 군량을 조달하고 호령을 전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국가 중흥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하여 한산도 대첩의 역사적 의의를 설명하였다. 한산도에는 현재에도 이순신 장군 관련 유적지가 많이 남아 있다. 지휘 본부로 활용한 운주당(運籌堂)의 자리에 세워진 제승당(制勝堂), 적의 동태를 감시하던 수루(戍樓), 활쏘기 연습을 했던 한산정(閑山亭), 이순신 사후에 영정을 모신 사당 충무사(忠武祠) 등이 그곳이다. 통영에서 한산도로 가는 뱃길에 있는 거북 등대는 그날의 감격을 더욱 의미 있게 전하고 있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역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