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박정희·김영삼이 바꾼 경복궁…문화재와 권력

“우리가 가장 통분히 여기는 것은 지금 중앙청(옛 조선총독부청사)이라는 것을 하필 경복궁의 신성한 기지(基地)를 쓰고 광화문을 옮기고…”(‘고적보존에 대하여’, 1949년)

 

“1000년을 지탱할 것이다.”(박정희, 1968년 콘크리트 광화문 복원식에서)

 

“민족문화의 정수인 문화재를 옛 조선총독부 건물에 보존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김영삼)

 

수 백년, 길게는 1000년 이상의 세월을 견디고 지금까지 전하는 문화재는 그 시간 안에서 변함없는 가치를 인정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착각이다. 문화재의 가치, 혹은 그것에 대한 인식은 당대의 필요에 따라 달라졌다. 조선 최고의 권부이자 당대 문화적 역량의 총합인 경복궁이 대표적 사례다. 경복궁은 한국 현대사의 격변에 큰 영향을 받았고, 시절에 따라 형태와 내용를 달리하며 존재했다.  11일 온라인으로 공개된 문화재청·한국미술사학회 공동의 학술심포지엄에서 국립완주문화재연구소 오춘영 소장은 통치권력의 이데올로기가 문화재에 미친 영향을 분석했다. 오 소장은 “문화재는 과거 기억의 증거물이라는 점에서 기억행위와 관련이 깊다. 그 기억은 과거 전체의 재생이 아닌 ‘선택’에 의한 재생”이라며 “20세기 동안 문화재 인식의 변화에는 당대의 통치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문화적 이데올로기가 반영되어 있다”고 분석했다. 

 

일제가 강점기 내내 조선의 궁궐 훼손에 혈안이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조선의 흔적을 지우고 일제의 지배를 강조하기 위한 시도였다. 창경궁은 동·식물원으로 활용됐고, 덕수궁은 영역이 크게 쪼그라들어 지금까지도 원래의 그것에 비하면 옹색하게 남아 있다. 경복궁 훼손의 결정판은 조선총독부청사의 건립이었다. 주요 건물을 뜯어내고 자리잡은 거대한 덩치의 조선총독부청사는 경복궁을 완전히 가려버렸다. 

 

경복궁을 가려버린 조선총독부 청사.

광복 후 이승만 정권은 일제의 우리 문화재 훼손을 비난하면서 가장 분노를 자아내는 사례로 경복궁을 지목했다. 이승만 정권은 “귀중한 고적을 보유하여 우리의 후생에 유전(遺傳)하여 세계 모든 우방들에게 구경시켜야 할 것”이라며 문화재 조사와 복원을 천명했다. 광복 후 우리 사회의 화두가 민족정체성의 회복이었다는 점에서 보면 당연한 방향 설정이었다. 

 

하지만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문화재 분야 역시 일제의 영향을 털어내는 데 실패했고 북한과의 체제 경쟁으로 문화재 보존, 복원으로 뒷전으로 밀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승만 우상화를 위해 문화재를 활용한 사실은 헛웃음을 나게 한다. 1958년 편찬된 ‘서울 명소고적’은 이승만의 쓴 현판 등 그의 흔적을 소개하는 한편 ‘리대통령 동상’, ‘리대통령송수탑’ 같은 것을 별도의 유적으로 담았다. 

 

문화재가 권력의 필요에 따라 활용된 가장 뚜렷한 사례는 박정희 정권 때 벌어진 일련의 일일 것이다. 경복궁에서는 정문인 광화문이 복원돼 당시 큰 주목을 받았다. 광화문은 일제가 총독부청사를 짓기 위해 1926년 경복궁 동쪽,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정문 인근으로 옮겼고, 6·25 때 문루가 파괴되어 석축만 흉하게 남아 있었는데 박정희의 지시에 따라 복원이 시작돼 1968년 12월 준공식이 열렸다. 기가 막힌 것은 목조 건물인 광화문을 콘크리트로 지었다는 사실이다.

 

콘크리트로 복원된 광화문

박정희가 “1000년은 지탱할 것”이라고 운운했던 게 그래서다. 콘크리트 광화문에 대한 비판은 박정희의 위세가 서슬푸른 시절이었음에도 거셌다. 시인 서정주는 “콘크리트라면 굳이 광화문을 복원하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그건 웃음거리가 아닌가?”라며 “불쾌한 얘기”라고 못박았다.

 

박정희 정권이 이런 비판을 받으면서도 광화문의 콘크리트 복원을 고집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당시 강하게 추진했던 경제발전의 한 상징인 콘크리트를 문화재에 마저 적용하고 싶어던 것이다. 이런 바람은 경복궁의 서문인 영추문에 적용었고, 영추문은 아직도 콘코리트로 남아 있다. 반면 콘크리트 광화문은 2007년 해체됐고, 2010년 8월 15일, 고종대 중건 당시의 모습으로 되살아났다. 

 

오 소장은 “문화재 보호는 민족 문화 관련 정책을 펴려 한 박정희 정부에 중요한 이슈였다”며 “박정희는 문화재를 국민의 자긍심을 높이는 수단으로 삼아 중요 유적 발굴과 사적지 정비를 대대적으로 추진했다”고 설명했다. 

 

경복궁의 중대한 변화는 김영삼 정권에서도 있었다. 정부중앙청사, 국립박물관 등으로 활용되며 살아남아 경복궁을 가리고 있던 조선총독부청사를 철거한 것이다.

 

조선총독부청사 철거 모습. 

광복 50주년을 맞은 1995년 시작한 조선총독부청사 철거는 당시 문화재 보존과 관련해 우리 사회에 큰 논란을 촉발했고, 지금도 평가가 엇갈린다. 철거를 주장하는 측은 총독부청사를 보며 울분을 토했고, 철거 반대 측에 친일의 혐의까지 두었다. 이들에게 총독부청사 철거는 민족정기를 바로세우는 것이었다. 반면 보존을 주장하는 쪽은 일제강점의 치욕 역시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인 만큼 그것과 관련된 총독부청사 역시 보존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치욕의 역사가 반복되어서는 안된다는 경각심을 키우고, 일제의 침략을 보여주는 증거로서 가치를 가진다는 생각이었다.  

 

전문가들의 의견이 팽팽하게 갈리는 가운데서도 김영삼이 철거를 결정할 수 있었던 철거 쪽으로 기울었던 여론 덕분인 것으로 보인다. 1992년의 한 조사에 따르면 서울 시민의 71.3%가 ‘철거 혹은 이전’에 긍정적이었다. ‘우리 역사의 수치’(71.8%)라는 이유가 가장 많았다. 1993년 6월 조사에서는 철거 찬성이 51.4%, 반대가 31%였다. 

 

오 소장은 “해체된 (조선총독부청사의) 첨탑을 독립기념관에 배치한 것은 이 건물 철거가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상징한다”고 평가했다. “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