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새벽. 서울시청 정문 앞에 세워진 안내표지판에 누군가 청테이프로 글씨를 만들어 붙였다. 성추행 의혹이 터진 박원순 서울시장을 강도 높게 비난한 글이었다. 전날까지만 해도 이 안내판에는 박 시장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들이 붙인 포스트잇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박 시장이 성추문 의혹과 관련해 아무 말 없이 영면하면서 각종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 ‘애도·추모의 시간’이 끝나고 ‘진실·진상규명의 시간’이 본격화하는 형국이다.
서울시공무원노동조합이 이날 성명서를 내고 “(박 시장의) 상당수 측근 인사들은 고인을 잘못 보좌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며 “작금의 상황을 (박 시장)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기에는 사안이 엄중하다”고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노조 측은 “고인을 가까이서 보좌해 온 인사들의 잘잘못도 규명돼야 한다”며 “사전에 몰랐다면 그 불찰이 큰 것이고, 사실이나 정황을 조금이라도 인지하고 있었다면 그에 상응한 책임도 무겁게 따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날 A씨의 폭로 직후에도 “성추행 피해 사실이 공식 창구로 접수된 적이 없다”고만 했던 서울시는 이날도 진상규명과 관련해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서울시 관계자는 “피해 직원이 ‘서울시 내부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묵살당했다’고 한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여성권익담당관 등에 알아본 결과 피해사실이 접수된 것이 없었다”고 말했다.
박 시장 사망 후 인권담당관 등 성희롱·성추행 사건처리 매뉴얼에 따른 신고부서를 조사해 A씨의 신고 여부를 파악했지만 없었다는 것이다. 다만, 이 관계자는 “박 시장을 보좌하기 위해 지방별정직 공무원으로 임용된 비서실 직원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수도 있다”며 “(이 경우) 비서실에서 제대로 조치를 하지 않으면 본인(A씨)이 정식으로 신고하지 않는 한 피해 사실이 알려지는 데 한계가 있다”고 덧붙였다.
서울시 측은 A씨가 기자회견을 통해 피해 사실을 주장한 만큼 기존 성희롱·성폭력 사건처리 메뉴얼대로 조사할지 다른 방식으로 할지 전문가 의견 등을 수렴해 결정하겠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앞서 서정협 시장 권한대행(행정1부시장) 등 서울시 고위 간부들은 전날 밤늦게까지 진상조사위원회 구성 등의 방법을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 시장 장례위도 진상 규명 여론이 높아지자 이날 “피해호소인이 제기한 문제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고인의 공과 과가 여과 없이 있는 그대로 평가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미래통합당은 철저한 진상규명을 위한 검찰 수사를 촉구했다. 주호영 원내대표는 “비서실 차원에서 (박 시장의) 성추행 방조 또는 무마가 지속해서 이뤄졌다는 서울시 내부자 제보를 받았다”면서 “제보가 사실이라면 지난 4년간 서울시장 비서실장 자리를 거쳐 간 분들, 젠더특보, 이런 분들 역시 직무 감독을 소홀히 한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검찰은 특임검사를 임명하거나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해서 진상을 밝히고 서울시장 비서실의 은폐·방조 여부 등을 밝혀 책임질 사람을 엄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박 시장의 피소 사실 유출 의혹도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어 수사가 불가피해 보인다. 경찰은 일단 박 시장이 쓰던 휴대전화에 대해 디지털 포렌식을 하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박 시장의 성추행 혐의나 수사정보 유출과 관련한 단서가 포착될지도 주목된다. 다만 박 전 시장의 휴대전화의 비밀번호를 푸는 데 최대 몇개월이 걸릴 수 있어 수사가 더디게 진행될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A씨는 이날 자신을 향한 2차 가해 관련 조사를 받기 위해 경찰에 출석했다. A씨 측은 “‘피해자의 신상을 색출하고 책임을 묻겠다’고 하는 이들이 많았다”며 “2차 피해로 더한 고통을 겪고 있다”고 밝혔다.
김유나·이종민 기자 yoo@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