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면 속 논란은 증폭… ‘박원순 성추행 의혹’ 진상규명의 시간이 왔다

“서울시, 고소장 제출 전 朴시장에 보고”… 민변·서울시 노조 “철저히 밝혀야” 성명
민주당 女의원들도 “市 대책위 꾸려야”… 통합당 “비서실 차원 성추행 방조 제보”
‘성추행 피해’ 도움 요청 묵살 의혹 서울시 조사 불가피
사진=뉴스1

14일 새벽. 서울시청 정문 앞에 세워진 안내표지판에 누군가 청테이프로 글씨를 만들어 붙였다. 성추행 혐의로 고소된 박원순 서울시장을 강도 높게 비난한 글이었다. 전날만 해도 이 안내판에는 박 시장 죽음을 애도하는 포스트잇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박 시장이 성추문과 관련해 아무 말 없이 영면하면서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 ‘애도·추모의 시간’이 끝나고 ‘진실·진상규명의 시간’이 본격화하는 형국이다.



서울시 내부는 그야말로 ‘폭풍전야’ 분위기다. 박 시장에게 오랫동안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한 전직 비서 A씨가 전날 대리인을 통한 기자회견에서 “4년간 성추행을 당했고 서울시 내부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묵살당했다”고 폭로한 뒤 서울시 차원의 진상조사가 불가피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A씨 주장이 사실일 경우 조직 차원의 방조·은폐 의혹이나 무능력·무관심 등으로 불길이 확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박 시장 측근들이 몰랐다는 것도 문제이고 알면서도 대수롭지 않은 일로 방관하거나 덮는 데 급급했다면 더 큰 문제다. 서울시는 A씨가 지난 8일 밤 경찰에 고소장을 제출하기 전 내부적으로 관련 내용을 파악해 박 시장에게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A씨가 경찰에 박 시장을 고소하기 한 시간 전쯤 박 시장이 피소 예정 사실을 보고받았다는 것이다. 다만 서울시가 최초 정보를 어디서 얻었는지는 파악되지 않았다. 논란 해소는 물론 재발 방지 차원에서라도 철저한 진상규명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다.

 

◆민변 등 줄 잇는 진상규명 촉구 목소리

서울시공무원노동조합(서공노)이 이날 성명서를 내고 “(박 시장의) 상당수 측근 인사들은 고인을 잘못 보좌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며 “작금의 상황을 (박 시장)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기에는 사안이 엄중하다”고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서공노는 “고인을 가까이서 보좌해 온 인사들의 잘잘못도 규명돼야 한다”며 “사전에 몰랐다면 그 불찰이 큰 것이고, 사실이나 정황을 조금이라도 인지하고 있었다면 그에 상응한 책임도 무겁게 따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여성인권위원회는 이날 성명을 내고 “무엇보다 사건 진상이 철저하게 규명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어 “진상규명 범위는 성추행·성희롱 여부뿐 아니라 서울시에서 고소인의 피해 호소에 따른 적절한 조치가 있었는지, 고소장 제출 사실이 어떤 경로로 피의자 지위인 박 전 시장에게 전달됐는지 등을 포함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김재련 법무법인 온·세상 대표 변호사가 13일 오후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의전화에서 열린 '서울시장에 의한 위혁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 고 박원순 서울시장이 고소인에게 보냈다는 비밀대화방 초대문자를 공개하고 있다. 뉴시스

더불어민주당 여성 의원들도 입장문을 내고 “서울시는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도록 외부인사가 참여하는 ‘진상조사 및 재발방지 대책 위원회’를 꾸려야 할 것”이라고 요구했다.

 

미래통합당 주호영 원내대표는 “비서실 차원에서 (박 시장의) 성추행 방조 또는 무마가 지속해 이뤄졌다는 서울시 내부자 제보를 받았다”면서 “제보가 사실이라면 지난 4년간 서울시장 비서실장 자리를 거쳐 간 분들, 젠더특보 역시 직무 감독을 소홀히 한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검찰은 특임검사를 임명하거나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해 진상을 밝히라”고 강조했다.

 

14일 오전 서울시청사 정문 앞에 설치된 안내 팻말 위에 고 박원순 서울시장을 비난하는 문구가 붙어있다. 커뮤니티 사이트 '디시인사이드'에는 청테이프로 글자를 만든 이 게시물을 직접 붙였다고 주장하는 사용자의 글이 이날 오전 5시 27분께 올라왔다. 연합뉴스

◆시, ‘조사 착수하되 방식은 신중’

 

A씨의 폭로 직후에도 “성추행 피해 사실이 공식 창구로 접수된 적이 없다”고만 했던 서울시는 진상조사에 착수키로 했으나 어떤 방식으로 할지에 대해선 신중한 자세를 보였다. 서울시 측은 A씨가 기자회견을 통해 피해 사실을 주장한 만큼 기존 성희롱·성폭력 사건처리 매뉴얼대로 조사할지 다른 방식으로 할지 전문가 의견 등을 수렴해 결정하겠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앞서 서정협 시장 권한대행(행정1부시장) 등 서울시 고위 간부들은 전날 밤늦게까지 진상조사위원회 구성 등의 방법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시장 장례위도 진상규명 여론이 높아지자 이날 “피해고소인이 제기한 문제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고인의 공과 과가 여과 없이 있는 그대로 평가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진혜원 대구지검 부부장검사 페이스북 캡처

◆현직 여성 검사가 2차 가해까지

 

현직 여성 검찰 간부가 박 시장과 팔짱 낀 사진을 올리며 박 시장을 추행했다는 글을 게시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진혜원(45) 대구지검 부부장검사는 전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박 시장 등 남성 2명과 팔짱 낀 사진을 게시하며 “몇년 전 (그때 권력기관에서 일하고 있었던 것 같다) 종로에 있는 갤러리에 갔다가 평소 존경하던 분을 발견했다”며 “냅다 달려가서 덥석 팔짱을 끼는 방법으로 성인 남성 두 분을 동시에 추행했다”고 적었다. 이어 “페미니스트인 제가 추행했다고 말했으니 추행”이라며 자신의 행위에 대해 “권력형 다중 성범죄”라고 썼다.

 

박 시장의 피소 사실 유출 의혹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어 수사가 불가피해 보인다. 경찰은 일단 박 시장이 쓰던 휴대전화에 대해 디지털 포렌식을 하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박 시장의 성추행 혐의나 수사정보 유출과 관련한 단서가 포착될지도 주목된다. 다만 박 시장의 휴대전화의 비밀번호를 푸는 데 최대 몇개월이 걸릴 수 있어 수사가 더디게 진행될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A씨는 이날 자신을 향한 2차 가해 관련 조사를 받기 위해 경찰에 출석했다. A씨 측은 “‘피해자의 신상을 색출하고 책임을 묻겠다’고 하는 이들이 많았다”며 “2차 피해로 더한 고통을 겪고 있다”고 밝혔다.

 

김유나·이종민·이창훈 기자 yoo@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