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새벽. 서울시청 정문 앞에 세워진 안내표지판에 누군가 청테이프로 글씨를 만들어 붙였다. 성추행 혐의로 고소된 박원순 서울시장을 강도 높게 비난한 글이었다. 전날만 해도 이 안내판에는 박 시장 죽음을 애도하는 포스트잇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박 시장이 성추문과 관련해 아무 말 없이 영면하면서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 ‘애도·추모의 시간’이 끝나고 ‘진실·진상규명의 시간’이 본격화하는 형국이다.
◆민변 등 줄 잇는 진상규명 촉구 목소리
서울시공무원노동조합(서공노)이 이날 성명서를 내고 “(박 시장의) 상당수 측근 인사들은 고인을 잘못 보좌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며 “작금의 상황을 (박 시장)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기에는 사안이 엄중하다”고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서공노는 “고인을 가까이서 보좌해 온 인사들의 잘잘못도 규명돼야 한다”며 “사전에 몰랐다면 그 불찰이 큰 것이고, 사실이나 정황을 조금이라도 인지하고 있었다면 그에 상응한 책임도 무겁게 따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여성인권위원회는 이날 성명을 내고 “무엇보다 사건 진상이 철저하게 규명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어 “진상규명 범위는 성추행·성희롱 여부뿐 아니라 서울시에서 고소인의 피해 호소에 따른 적절한 조치가 있었는지, 고소장 제출 사실이 어떤 경로로 피의자 지위인 박 전 시장에게 전달됐는지 등을 포함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더불어민주당 여성 의원들도 입장문을 내고 “서울시는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도록 외부인사가 참여하는 ‘진상조사 및 재발방지 대책 위원회’를 꾸려야 할 것”이라고 요구했다.
미래통합당 주호영 원내대표는 “비서실 차원에서 (박 시장의) 성추행 방조 또는 무마가 지속해 이뤄졌다는 서울시 내부자 제보를 받았다”면서 “제보가 사실이라면 지난 4년간 서울시장 비서실장 자리를 거쳐 간 분들, 젠더특보 역시 직무 감독을 소홀히 한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검찰은 특임검사를 임명하거나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해 진상을 밝히라”고 강조했다.
◆시, ‘조사 착수하되 방식은 신중’
A씨의 폭로 직후에도 “성추행 피해 사실이 공식 창구로 접수된 적이 없다”고만 했던 서울시는 진상조사에 착수키로 했으나 어떤 방식으로 할지에 대해선 신중한 자세를 보였다. 서울시 측은 A씨가 기자회견을 통해 피해 사실을 주장한 만큼 기존 성희롱·성폭력 사건처리 매뉴얼대로 조사할지 다른 방식으로 할지 전문가 의견 등을 수렴해 결정하겠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앞서 서정협 시장 권한대행(행정1부시장) 등 서울시 고위 간부들은 전날 밤늦게까지 진상조사위원회 구성 등의 방법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시장 장례위도 진상규명 여론이 높아지자 이날 “피해고소인이 제기한 문제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고인의 공과 과가 여과 없이 있는 그대로 평가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현직 여성 검사가 2차 가해까지
현직 여성 검찰 간부가 박 시장과 팔짱 낀 사진을 올리며 박 시장을 추행했다는 글을 게시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진혜원(45) 대구지검 부부장검사는 전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박 시장 등 남성 2명과 팔짱 낀 사진을 게시하며 “몇년 전 (그때 권력기관에서 일하고 있었던 것 같다) 종로에 있는 갤러리에 갔다가 평소 존경하던 분을 발견했다”며 “냅다 달려가서 덥석 팔짱을 끼는 방법으로 성인 남성 두 분을 동시에 추행했다”고 적었다. 이어 “페미니스트인 제가 추행했다고 말했으니 추행”이라며 자신의 행위에 대해 “권력형 다중 성범죄”라고 썼다.
박 시장의 피소 사실 유출 의혹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어 수사가 불가피해 보인다. 경찰은 일단 박 시장이 쓰던 휴대전화에 대해 디지털 포렌식을 하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박 시장의 성추행 혐의나 수사정보 유출과 관련한 단서가 포착될지도 주목된다. 다만 박 시장의 휴대전화의 비밀번호를 푸는 데 최대 몇개월이 걸릴 수 있어 수사가 더디게 진행될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A씨는 이날 자신을 향한 2차 가해 관련 조사를 받기 위해 경찰에 출석했다. A씨 측은 “‘피해자의 신상을 색출하고 책임을 묻겠다’고 하는 이들이 많았다”며 “2차 피해로 더한 고통을 겪고 있다”고 밝혔다.
김유나·이종민·이창훈 기자 yoo@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