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박원순 서울시장이 극단적 선택을 하기 전 그를 만나 “실수하신 것 없냐”고 물었던 임순영 젠더 특별 보좌관(젠더특보)가 결국 사의를 표명했다. ‘성평등’을 강조하며 박 시장이 만들었던 젠더특보가 정작 박 시장이 성추행 의혹에 휩싸이는 동안 이를 막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의 공석 이후 곧바로 자리를 내려놓겠다고 밝힘에 따라 ‘책임론’이 부상하고 있다.
17일 서울시에 따르면 임 특보는 전날(16일) 사표를 제출했다.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공관을 나가 자취를 감췄던 박 시장이 주검으로 발견된 지 약 일주일 만이다. 서울시에서는 아직 사표를 수리하지 않고 대기발령했다고 밝혔다. 서울시가 추진 중인 진상규명 민관합동조사단에서 향후 임 특보를 조사해야 할 필요성 때문이란 해석이다.
임 특보는 박 시장에게 처음 성추행 의혹과 관련해 언질을 줬던 인물로 알려졌다. 심지어 박 시장의 전 여성 비서 A씨가 고소장을 제출한 지난 8일 오후 4시30분보다 1시간30분 앞선 오후 3시, 박 시장을 만나 “혹시 실수한 것 있으시냐”고 물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인권 및 여성단체 등에서 근무했던 임 특보가 성추행 고소 진행 건을 미리 파악하고 있던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되는 이유다.
임 특보는 당시 박 시장에게 언급한 ‘불미스러운 일’이 “성추행 관련 혐의인 줄은 몰랐다”고 주장하고 있다. 임 특보에 따르면, 당시 박 시장은 “그게 무슨 소린가?”라고 물었고 임 특보는 “불미스러운 이야기들이 돈다”고 말했다. 박 시장은 “바빠서 잘 모르겠다”고 자리를 뜬 것으로 알려졌다. 박 시장은 이후 최측근들과 공관에서 대책회의를 한 것으로 확인됐는데 이 자리에서 성추행 피소 건과 대처 방안 등이 논의됐는지를 놓고는 증언이 엇갈린다.
젠더특보는 자신을 ‘페미니스트’라 지칭했던 박 시장이 서울시 행정 및 정책에 ‘성인지 감수성’을 적용하겠다며 지난해 1월 만든 직위다. 첫 젠더특보로 임명된 임 특보는 한국성폭력상담소, 국가인권위원회, 한국인권재단, 희망제작소, 더불어민주당 남인순 의원실 보좌관 등을 거쳤다. 임기는 내년 1월까지였다.
임 특보는 임명 초기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사후약방문식 처방보다는 ‘예방주사’ 역할을 통해 성차별 요소를 없애겠다고 발표했다. 피해자 A씨는 앞서 기자회견에서 재직 중 부서 이동을 요청하는 등 서울시 내부에서 여러 차례 피해를 호소했으나 제대로 된 조치를 받을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피해자 측은 지난 16일 보도자료를 통해 서울시 내부에 성희롱·성차별적 분위기가 만연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젠더특보의 의미가 퇴색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다. 미래통합당 김은혜 대변인은 17일 오후 논평을 통해 “새 속옷 챙겨주기, 낮잠 깨우기, 남들이 안 볼 때는 여성 비서가 조깅해주기, 조선왕조 드라마 같은 이야기다”며 “대명천지에 박 시장 집무실에서 피해 여성이 맡아야 했던 업무”라고 꼬집었다.
박 시장 사태에 대한 진상 조사 요구가 높은 상황에서 임 특보가 사의를 표명한 것도 자칫 ‘책임 회피’로 보일 수 있다는 지적이다.
박지원 국정원장 후보 미래통합당 청문자문단장을 맡은 김근식 경남대 교수는 지난 16일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박 전 시장 사건의 실체규명의 첫 단계는 젠더특보의 솔직한 증언”이라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외부에서 시장님 관련 불미스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궁금한데도 내용을 묻지도 않고 성추행 의혹을 전혀 모르는 채 급하게 독대를 청해 불미스런 게 무엇이냐고 상사에게 되묻는 부하는 없다”고 의혹을 제기하며 “여성운동을 오래했고 여성인권 향상을 위해 헌신해 온 과정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라도 젠더특보는 지금이라도 진실을 밝혀야 한다. 거짓말을 할수록 일은 계속 꼬이게 된다”고 일침했다.
황규환 통합당 부대변인도 17일 논평에서 “고소가 이뤄진 뒤에도, 여성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임명된 젠더특보는 피해자가 아닌 박 시장을 찾았다”며 “피해자 측 주장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에 대한 철저한 조사도 필요하다”고 밝혔다.
나진희 기자 naji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