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지지’ 흑인 인권운동가 찰스 에버스 별세

트럼프 “개척자적 정치인… 깊은 슬픔 느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흑인 인권운동가 찰스 에버스의 타계를 애도하며 백악관 집무실에서 그와 함께 찍은 사진을 SNS에 올렸다. 트위터 캡처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로서 ‘워크페어(workfare)’라는 용어를 처음 쓴 것으로 유명한 찰스 에버스 전 미시시피주 파예트 시장이 22일(현지시간) 9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그를 ‘개척자적 정치인’이라고 부르며 깊은 애도의 뜻을 표했다.

 

찰스 에버스는 1922년 미시시피주에서 태어났다. 또래의 청년들처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에서 싸웠고 전후에는 식당 경영자 등으로 활동했다.

 

그의 인생이 전기를 맞은 것은 1963년 동생 메드가 에버스가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당하면서다. 1960년대 초 흑인 인권운동이 미 전역에서 급속히 확산하며 노예제도가 있던 시절부터 흑백 갈등이 첨예했던 남부지역은 날카로운 긴장 상태가 계속됐다. 에버스 형제가 살았던 미시시피주도 예외가 아니었다.

 

1963년 6월 당시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흑인 인권 신장에 관한 연설을 했고 이는 TV로 생중계됐다. 그런데 케네디 대통령의 연설 직후 메드가 에버스가 자신의 집 앞 덤불에서 누군가에 의해 살해된 채 발견됐다. 메드가 에버스는 전미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NAACP) 미시시피주 지부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메드가 에버스의 죽음은 흑인 인권운동가에 대한 테러였던 셈이다.

 

이 사건 후 미국인의 추모가 이어졌으며 유명 가수 밥 딜런은 메드가 에버스를 추모하는 노래까지 만들어 불렀다. 형 찰스 에버스는 동생의 사망을 계기로 NAACP 미시시피주 지부장 자리를 넘겨받아 흑인 인권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1960년대 미 남부지역에 살았던 흑인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찰스 에버스도 젊어선 민주당 지지자였으나 1969년부터는 민주당이나 공화당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무당파’로 활동했으며 1978년 이후로는 공화당 지지를 표방했다. 그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과도 가깝게 지냈다.

 

1968년 찰스 에버스가 처음 사용한 ‘워크페어’라는 용어는 이제 널리 쓰이는 말이 되었다. ‘일자리(work)야말로 최고의 복지(welfare)’라는 뜻이다. 찰스 에버스는 흑인 청년들이 양질의 일자리를 가지는 것이 인종차별을 없애고 흑백 통합을 이루는 지름길이라고 여겼다. 

 

1969년부터 1981년까지 12년간, 그리고 1985년부터 1989년까지 4년간 도합 16년 동안 미시시피주 파예트 시장을 지냈다. 정계를 떠난 뒤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지도자협의회’ 자문위원을 맡아 흑인 인권운동을 계속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의 별세 소식을 접한 직후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내 친구 찰스 에버스의 타계에 깊은 슬픔을 느낀다”며 “찰스는 개척자적 정치인이었다”고 밝혔다. 이어 “동생 메드가와 더불어 시민권 운동에 있어 두려움을 모르는 지도자였다”고 고인을 추모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