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를 ‘디폴트’ 인간으로 간주하는 것은 오랜 기간 지속된 인간 사회구조의 근간이라 할 수 있다. 인간 진화에 관한 이론들만큼이나 오래된 뿌리 깊은 습관이다. 유사 이래로 사람은 남자와 동일시돼왔다. 영어의 ‘man’과 같이 인도유럽어 계통에서는 ‘남자’를 뜻하는 말이 동시에 ‘사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이란 으레 남자라고 여긴다.
영국의 언론인이자 여성운동가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는 ‘보이지 않는 여자들’에서 남성을 위해, 남성에 의해 설계된 이 세계가 어떻게 인구의 반, 여성을 배제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남자가 표준인 세상에서 여자가 어떻게 투명인간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남자를 인간의 디폴트값으로 여기는 사고방식 때문에 여성과 관련된 지식과 정보는 제대로 수집되지 않으며, 그렇게 생겨난 데이터 공백은 여자들을 가난하게 만들고 아프게 만들고 때로는 죽이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이뿐 아니다. 2007년의 한 연구에 따르면 약리학 논문의 90%가 수컷만을 시험한 결과를 토대로 했다. 2014년의 다른 논문에서는 동물실험의 22%가 성별을 명시하지 않았으며, 명시한 시험의 80%는 수컷만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드러났다. 여성은 남성보다 우울증을 앓을 확률이 70% 높은데도 뇌질환에 관한 동물실험은 수컷을 대상으로 한 것이 5배나 더 많다. 이러다 보니 의사들의 처방과 치료법은 남성에게만 적합하고 여성에게는 오히려 목숨을 위협할 수도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세계 각국에서 심장병 예방약으로 자주 처방되는 스타틴은 거의 남성 피험자만을 대상으로 시험 돼 왔으나 최근 호주에서 진행된 연구 결과 스타틴을 고용량으로 복용하는 여성은 당뇨병에 걸릴 위험이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당뇨병은 남자보다 여자에게 심혈관질환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으니 심장병을 예방해야 할 약이 오히려 심장병을 재촉하는 셈이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수많은 기업과 대학에서 시행 중인 성과 중심의 업무평가제는 ‘돌볼 대상이 없는 직원’에게 유리하다고 지적한다. 전 세계적으로 여성이 무급 돌봄노동의 75%를 담당하며 매일 무급 노동에 3∼6시간을 들인다는 점을 감안할 때, 자녀가 있는 맞벌이 여성은 일터에서 출발선이 다른 경주를 하는 셈이다. 국가의 경제 규모를 가늠하는 기준인 GDP에는 집안일이나 돌봄이 포함되지 않아 여성의 노동가치나 생산성을 저평가하는 핑곗거리가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기술과 노동, 의료, 도시계획, 경제, 정치, 재난 상황 등 16가지 영역에 걸쳐 여성에게 불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의 실체를 낱낱이 밝히며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과 차별의 단면을 면밀하게 보여준다. 그간 은폐되고 누락되었던 여성의 관점과 지식을 복원하는 것이 남녀 모두, 나아가 세상에 어떤 이득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이 세상이 재현되는 방식은 세상 자체와 마찬가지로 남자의 작품이다. 그들은 자신의 관점에서 세상을 묘사해놓고 그것이 절대적 진실이라고 착각한다.” 20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철학자, 여성운동가였던 시몬 드 보부아르의 말을 절감케 하는 책이다.
박태해 선임기자 pth1228@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