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도권 소재 중견기업에 다니던 A씨는 자신을 성폭행한 옛 직장상사와 3년째 법정 다툼 중이다. 대학 졸업 후 인턴십 과정으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이때부터가 악몽의 시작이었다. 입사 후 한 달도 안 돼 화장실 불법촬영의 피해자가 됐고, 그 뒤에는 직장 상사에게 성폭행까지 당했다. 사측은 사실관계 확인 후 ‘없던 일’로 하라고 종용했다. 갖은 압박과 회유에 A씨는 결국 회사를 나와야만 했다. 새로운 삶을 찾아야 했지만, 재취업은 꿈도 못 꾸는 상태다. 다니던 회사에서 신상정보가 유출된 탓에 누군가 자신을 알아볼까봐 대인기피증까지 생겼다. A씨를 성폭행한 직장상사는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지만 2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이 사건은 현재 대법원 판단을 앞두고 있다.
지난달 30일 취재팀이 만난 미투 피해자의 최근 삶이다. 생계가 걸린 공동체 안에서 성폭력 피해를 고발한다는 것은 일상 전부를 걸어야 하는 가혹함으로 이어졌다. A씨의 경우 결국 직장을 떠나야 했다. 신고를 결심하기까지의 과정도 만만치 않지만 고발 이후 몰려드는 두려움과 불안감도 상당하다. 많은 경우 가해자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아 고통스럽고,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이상하게 몰아가는 집단 따돌림도 흔하게 일어난다.
가해자는 처벌받고 피해자는 보호받을 것이란 믿음으로 법에 호소하지만, 사회의 낮은 성인지감수성을 마주하고 스스로 피해를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지속적으로 놓이면서 어려움은 가중된다. 일반인에게는 낯선 경찰서와 고용노동부를 드나드는 일도 피해자에게 긴장되는 일이다. “성희롱 신고 이후 피해 노동자의 삶은 고단합니다. 직장에서 부당한 행위에 문제를 제기할 경우 생계의 곤란이 예상되고, 회사에서는 ‘문제를 일으킨 자’로 낙인 찍히기도 하죠.” 최수영 서울여성노동자회(서울여노) 활동가의 설명이다.
◆‘직장 미투’ 피해자 절반 “불리한 처우 경험”
서울여노 평등의전화·고용평등상담실에 따르면 직장 내 성희롱 문제를 거론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피해를 받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직장 내 성희롱 문제로 상담받은 이들의 절반(49.1%)이 피해 사실을 공론화하는 과정에서 불리한 처우를 당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직장 내 성희롱은 사업주이거나 상사가 행위자인 경우(80.2%)가 대부분으로, 이들이 성희롱 확인 등 처리기간에 피해자를 업무에서 배제하는 사례가 많았다. 상사와 문제가 생기면서 동료들로부터도 무시나 괴롭힘이 발생하게 된다.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에 관한 법률에 근거해 마련된 불이익 조치 금지항목 7가지를 기준으로 내담자들의 2차 피해 경험을 조사한 결과 ‘집단 따돌림, 폭행 또는 폭언 등 정신적·신체적 손상을 가져오는 행위를 하거나 이를 방치한 행위’가 39.4%로 가장 많았고, ‘파면, 해임, 해고 등 신분 상실에 해당하는 불이익 조치’가 23.4%, ‘직무 미부여 또는 재배치 등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인사 조치’는 7.6%로 나타났다.
믿었던 동료들에게마저 외면받을 때 피해자의 상처는 극대화된다. 법률사무소 오페스의 송혜미 변호사는 “첫 상담 때만 해도 피해자들은 ‘주변에서 가해자에게 다들 잘못했다고 하지 않겠냐’고 하지만 이후 그런 지탄이 별로 없는 것을 보며 절망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피해자의 동료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힘이 있는 가해자와도 얽혀 있기 때문이다. 직장 동료의 진술서 한 장 받기도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운 이유다. 증인 보호도 아직 되지 않아 피해자를 도와 진술할 이를 찾기는 정말 쉽지 않다.
조직 구성원들이 피해자를 직접적으로 탓하지 않더라도, 피해자는 ‘평지풍파를 일으킨 사람’이라는 데 대한 암묵적 책임을 느낀다. 송 변호사는 “누가 무엇을 했다는 잘잘못을 떠나 분란을 일으켰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 눈치 보게 만드는 분위기가 있다”며 “이러한 압박에 시달리다가 피해자는 이사를 하거나 직종을 아예 바꾸고, 심한 경우 이민까지도 고려하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피해자로만 남지 않기 위한 싸움
최근 들어 2차 피해에 적극적으로 대응을 결심하는 피해자들도 늘고 있다. ‘피해자로만 남지 않기 위한’ 오랜 싸움을 시작하는 것이다.
서울여노 측은 미투운동 이후 가해자에게 사과받고 싶다거나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는 사례, 직장 내 성희롱 고충 신고 및 신고 후 대응 방법을 문의하는 사례, 형사처벌이나 피해 보상 관련 문의 등이 증가하는 추세라고 밝혔다. 피해를 입고 고발하는 순간에는 무력감에 떨었지만 대응 과정에서 조금씩 강해지고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기도 한다.
최수영 활동가는 “성폭력을 신고한다는 건 삶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주체적으로 대응했던 경험”이라며 “이후 어떤 문제가 생기면 조금 더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도움받을 곳을 알아보거나 비슷한 피해를 겪은 이에게 조언을 해 줄 수도 있게 된다”고 밝혔다. 이렇게 그들은 피해자에 그치지 않고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이 된다고 최 활동가는 덧붙였다.
“제가 무엇을 잘못했을까요?”라고 묻는 피해자들에게 상담사들은 “피해를 입은 건 잘못이 아니다. 가해자가 잘못한 것”이라고 답한다. “지금도 힘든데 문제 제기하면 더 힘들 것 같다”는 말에는 “그냥 넘어가면 덜 힘들까요?”라고 묻는다. 여전히 피해자에게 가해지는 손가락질이 아픈 사회에서 미투 참여자들은 “내가 가만히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가 생길 것 같아서 힘들지만 신고하겠다”고 결심한다.
서울여노 신상아 사무국장은 “오랫동안 성폭력 피해자에게 화살을 돌려온 사회는 피해자 스스로를 자책하고 검열하게 만들고, 피해를 말하기도 어렵게 했다”며 “피해를 말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은 이러한 흐름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피해자들에게는 ‘나만 겪은 일이 아니다’, ‘내가 잘못해서 생긴 일이 아니다’는 사실을 알리고, 사회에는 ‘성폭력은 범죄다’, ‘피해자는 보상을 받고 가해자는 처벌받아야 한다’는 인식을 확산시킬 수 있다는 설명이다.
특별기획취재팀=안용성·윤지로·정지혜·박지원·배민영 기자 wisdom@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