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잃고 뿔뿔이 찢어지고 갈라지고 할퀴어진 시대에도, 사람들은 성장하고 꿈을 꿨다. 1930년대 프랑스와 독일에서 그린 배운성의 작품들 속에는 그 꿈이 생생하다.
지난달 29일부터 서울 종로구 홍지동 웅갤러리와 본화랑에서 열리고 있는 ‘배운성 전 1901-1978:근대를 열다’에는 1922년 한국인 최초로 유럽 유학을 한 배운성의 유럽 활동 시절 작품 40여점이 전시됐다.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대표작 ‘가족도’를 비롯해 ‘화가의 아내’, ‘한국의 어린이’, ‘어머니 초상’, ‘행렬’, ‘한국의 성모상’ 등 1930년대 전성기 시절 유럽에서 완성한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배운성은 비록 나라를 잃었지만 우리의 정신과 문화는 잃지 말자고 매일같이 결의한 사람처럼, 끊임없이 고향과 어머니, 한국의 모습과 풍습을 서양화 속에 그려넣었다. ‘박씨의 초상’에선 인물이 보고 있는 책 속에 꾹꾹 힘주어 눌러 새겨넣은 빼곡한 한글에서 조국을 그리워한 그의 마음이 전해진다. ‘화가의 아내’, ‘한국의 어린이’ 등에서는 서양화 속에 동양의 세필로 극히 섬세하게 새겨넣은 옷 무늬가 유난히 도드라진다. 그가 유럽 한복판에 서 있는 어느 식민지 동양인으로서 꿈꾼 예술의 지향점이 뚜렷하게 전해진다.
서양의 기술과 동양의 기술을 오가며 섬세함을 뽐낸 작품들 못지않게 눈길을 사로잡는 작품들은 개작의 흔적이 보이는 작품들, 덧칠을 하다 말아 미완성인 채로 발견된 작품들이다.
그는 셔츠에 타이를 맨 남자의 초상을 그렸다가 그 위에 두루마기로 덧칠하는가 하면, 마른 강아지를 그렸다가 털이 복실한 강아지로 덧칠했다. 팔이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은 여성 그림 위에 긴팔 레이스를 덧입히려다 만 작품 앞에 서면, 어느 고군분투하는 화가의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그림을 완성한 뒤에도 자신의 작품을 탐구하고 고민하다 이내 생각을 바꾸고 다시 덧칠을 시작했을 배운성.
그는 1922년 독일로 가 베를린 국립예술대학 대학원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1927년 파리 살롱 도톤에 출품한 목판화 ‘자화상’이 입선했고 1933년 바르샤바 국제미전 1등상, 1935년 함부르크 민속미술박물관 개인전, 1936년 프라하 개인전을 열며 입지를 다졌다. 1937년 파리로 이주한 후 세계 3대 화랑인 파리 샤르팡티에 화랑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열어 유럽 화단의 인정을 받았다. 1940년 파리가 독일군에 함락되면서 서둘러 귀국했는데, 이때 그림 167점을 남겨두고 왔고 “그림을 가져와야 한다”며 두고두고 걱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에 온 후 1949년 홍익대 미술과 초대학장을 맡는 등 한국미술과 교육에도 열정을 쏟았다. 6·25전쟁 중 월북했고, 이후 굴절된 우리 역사는 근대를 연 화가 배운성을 월북작가라는 전가의 보도로 도려냈다. 전시는 오는 29일까지다.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