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왕설래] 사치의 여왕

동서고금을 통틀어 중국 청나라 서태후만큼 식사를 거하게 한 이도 없다. 4000가지의 산해진미를 즐겼다. 지방 순시 때는 4량의 주방을 갖춘 16량의 긴 열차가 동원됐는데, 화덕 50개와 100명의 요리사가 100가지 요리를 만들었다. 곰 발바닥, 원숭이 골, 낙타 등, 호랑이 고환 같은 진기한 음식이 개발된 것이 서태후 통치 시절이다. 피부 미용에 탁월하다며 사람의 모유도 매일 저녁 거르지 않고 마셨다. 서태후만큼 사치를 생활화한 여성 권력자도 드물다. 비취 구슬과 진주를 매단 옷이 3000상자가 넘었고 비취 식탁·식기가 아니면 수저를 들지 않았다니 말해서 무엇하랴. 1908년 73세로 숨질 때까지 48년간 수렴청정을 한 서태후의 사치는 청나라의 멸망을 재촉했다.

1986년 필리핀 시민혁명으로 축출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 부인 이멜다의 사치는 서태후에 못지않다. 남편 권력을 이용해 16억달러의 재산을 모아 ‘세계 최고의 여성 갑부’ 소리를 들었다. 시위대는 대통령궁 지하 수장고를 보고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2200여켤레의 구두와 508벌의 가운, 427벌의 드레스, 71개의 선글라스 등 명품이 가득 쌓여 있던 탓이다. 이멜다의 해명이 가관이다. “궁핍한 국민은 숭배할 수 있는 스타를 원하며 나는 이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아름다워야 할 의무가 있다.” 이멜다의 사치는 필리핀의 부패와 국격 추락을 부채질했다.



“사치는 유혹적인 쾌락이요, 비정상적인 환락이다. 그 입에는 꿀이, 그 마음에는 쓸개즙이, 그 꼬리에는 바늘 가시가 있다.” 사치의 위험성을 강조한 영국 시인 F 퀼즈의 말이다.

나집 라작 전 말레이시아 총리가 2009년 자신이 설립한 국영기업 ‘1MDB’을 통해 45억달러를 횡령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부인 로스마 만소르는 ‘사치의 여왕’으로 유명하다. 2018년 경찰이 나집 전 총리 집을 압수수색했을 때 보석, 명품 핸드백, 시계 등 2억7500만달러어치 사치품이 쏟아져 나왔다. 압수품을 옮기는 데 트럭 5대를 동원해야 했다. 권력자 부인이 ‘사치의 여왕’ 별명을 얻는 나라는 국운이 쇠퇴했다. 청나라와 필리핀이 생생한 증거다.

김환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