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동의 비단 신발에 버선발을 넣고 있는 모습이 조심스럽다. 황금빛 자수가 빨간 치맛자락 위에 반짝거린다. 이 사람은 누굴까. 고개를 들면, 앳된 흑인 소녀가 설레듯 미소 지은 얼굴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작품명 ‘워크 인 유어 슈’(Walk in your shoe). 한국 전통 의상을 입은 흑인 소녀라는 ‘반전’과 역지사지를 영어로 표현할 때 상대의 신발을 신는다는 관용어(put yourself in someone else’s shoes)에서 착안해 작가의 주제의식을 표현했다. 이 작품이 놓인 공간은 미술관이 아닌 한 호텔 벽면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대형 공공미술관들이 휴관하거나 인원 제한을 두면서 미술을 가까이 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지만, 한편에선 이 같은 ‘미술관 밖 미술’이 늘어나면서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다.
이외에도 한국 1세대 그라피티 아티스트 제이플로우의 ‘산책’과 부산을 대표하는 그라피티 아티스트 구헌주의 ‘부산호’도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산책’은 그가 한국을 대표하는 정통 그라피티 아티스트다운 스프레이 그림의 역동성과 강렬함이 뚜렷하다. 그라피티 본연의 매력을 보여준다. ‘부산호‘는 바다를 앞에 두고 가파른 산자락 경사면에 형성된 부산만의 독특한 마을 풍경이 주는 아름다움을 그려냈다. 부산에 대한 작가의 애정어린 시선이 느껴진다.
한 베테랑 큐레이터는 “그라피티는 과거 낙서, 문자 중심이었지만 이제 표현 대상은 그림 중심으로, 표현 양식도 그 어느 회화작품 못지않게 극사실적이거나 세밀한 묘사로 다양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스프레이로 주로 문자를 그리고 도망가고 지워지며 낙서로 해석됐던, 예술보다는 문화활동이었던 그라피티에 새 장이 열리고 있는 셈이다. 오히려 미술관 밖이기 때문에 가능한 이 작품들은 진화를 거듭하며 변방이나 예외가 아닌 또 하나의 미술이 되고 있다.
부산=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