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무지했다. 작곡가 안익태의 행적을 통람한 것은 최근 그의 친일 논란이 빚어진 후였다. 평양 숭실중학교에 다니던 소년 안익태는 친일 교사 추방을 위해 동맹 휴학을 주도했다가 무기정학을 당했다. 3·1운동 후에는 감옥에 갇힌 독립투사를 구출할 계획을 세웠다. 선교사 출신 교장의 도움으로 체포를 면하고 일본 유학길에 올랐지만 반일운동 전력이 발목을 잡았다. 그는 음악 실력 하나로 난관을 뚫었다. 유학 도중 고국을 방문해 음악으로 민족혼을 일깨웠다. 조만식 선생의 요청으로 첼로를 들고 평양 도심을 돌았다. 무명옷을 입은 조만식 선생과 동포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망국민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려는 의도였다.
비록 지도에서 조국이 사라졌지만 안익태는 조국을 잊지 않았다. 미국 활동 시절에 자신이 ‘코리안’임을 당당히 밝혔다. 관객들은 연주가 끝날 때마다 “코리안 원더풀!”이라고 화답했다. 애국가 작곡이 열매를 맺은 것은 독일 체류 시절이었다. 그때까지는 안창호 선생이 만든 것으로 알려진 가사를 외국민요 ‘올드랭 사인’에 맞춰 불렀다. 남의 옷을 걸치고 있었던 셈이다. 그는 작곡 과정에서 ‘반드시 하늘의 도움으로 독립을 이룰 것’이라는 염원을 담아 ‘하느님’ 대목에 힘을 주었다. 2년여 만에 완성된 애국가는 미국 내 독립운동단체에 보내졌다. 상하이 임시정부 요인들도 악보를 받자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