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 시대 고독·우울… 현대인의 불안한 내면

독일작가 팀 아이텔 개인전 ‘무제’
최신작 ‘멕시코 정원’ 등 70여점 선봬
절제된 배경·깊이있는 색감 잘 활용

‘이 시대 가장 세련된 우울’

팀 아이텔을 두고, 이 말 외에는 달리 설명할 표현을 찾기 힘들다. 한두 명의 사람과 절제된 배경, 가늠할 수 없는 깊이감을 주는 어두운 탁색의 색감은 보는 이의 심연을 건드린다. 그의 회색 마법은 캔버스에 분위기를 옮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 많은 책쟁이들이 그의 그림을 자신의 책 표지에 쓰고 싶어하는 것도 당연하다.



대구미술관에서는 독일 작가 팀 아이텔의 개인전 ‘무제(2001-2020)’가 지난달부터 열리고 있다.

'시퀀스'(Sequence)

2001년 초기작부터 올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통행금지 조치가 내려진 프랑스 파리에서 완성한 최신작 ‘멕시코 정원’까지 20년간의 작품을 총망라했다. 전 세계 8개국에 퍼져 있는 소장처 50여곳에서 작품을 대여해와 70여점을 선보이는 대규모 회고전이다.

팀 아이텔은 1971년 서독에서 태어나 동독에서 철학과 문학을 공부한 뒤 예술의 길에 들어섰다. 사회주의 예술의 회화전통이 강력한 라이프치히 화파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추상성이 강했던 서독 출신으로서 독특한 스타일을 창조해냈다. 신라이프치히 화파의 대표주자로 불리고 있다.

전시는 그가 그림을 그리기에 앞서 참고한 사진 약 370점, 책 약 30권 등 자료를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관람객은 마치 그의 작업실에 들어온 손님처럼 전시공간에 들어서게 된다.

그는 일상에서 포착한 장면을 사진으로 남기고, 이 사진들을 보며 그림을 그렸다. 이 가운데 어떤 소재들을 빼거나, 캔버스 위에서 지우는 방식으로 무언가 생략된 일상, 그래서 더 비현실적이고 가상적인 세계 같으면서도 현대인의 고독과 내면에 집중하게 만드는 작품들을 그렸다. 바로 그 과정에 사용된 자료들을 전부 공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어 ‘현대미술관(MMK)’, ‘레드 앤 블루(Red and Blue)’ 등 기하추상 작품 같은 배경 위에 극사실적으로 묘사된 인물이 어우러진 작품들이 본격적으로 팀 아이텔의 세계로 안내한다. 단번에 몬드리안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정도로 명백한 추상과 세밀하고 수준 높은 구상이 혼합된 상징적 작품들이 제일 먼저 모여 있다. 팀 아이텔을 처음 접하는 관람객들에게도 쉽고 뚜렷한 인상을 주는, 친절한 안내서로 다가온다. 마침 이 작품들을 미술관 내 커다란 유리창과 격자무늬 창틀이 액자처럼 보이는 공간에 전시해 더욱 조화롭다.

'레드 앤 블루'(Red and Blue)

회색벽이 시작되는 섹션에 들어서면 새까맣게 어두운 그림들이 걸려 있다. 조명을 급격히 낮춰둔 덕에 관람객의 동공이 커지면 그제서야 지독한 어둠 속에 녹여 넣은 인물들이 형태를 드러낸다. 세련된 작품은 세련되게, 영리한 작품은 영리하게 배치한 기획력도 돋보인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에세이집 ‘느낌의 공동체’ 표지로도 잘 알려진 작품 ‘보트’부터 신작 ‘멕시코 정원’ 연작까지, 모두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작품들이다.

멕시코 정원 연작은 전경1과 전경2를 비교하도록 만든 수수께끼가 흥미롭다. 두 등장인물은 얼핏 남자에게 다가가는 여자의 모습 같지만, 자세히 보면 여자의 시선은 남자를 향하고 있지 않아 둘은 함께가 아닌 각자 개개인으로 존재한다. 둘인 줄 알았던 등장인물은 모서리에 감추어진 한 사람과, 금속 공에 비친 두 사람까지 총 5명이어서 이 공간은 실은 적지 않은 사람들이 머물고 있는 공간임을 뒤늦게 눈치채게 된다. 이를 발견하고 나면 인적 드문 외로운 공간인 줄로만 알았던 배경도 새롭게 다가온다. 미끄러질 듯 매끈한 배경을 그려왔던 그가 자기만의 스타일로 정원을 배경으로 그려냈다. 차갑고 도회적인 기존 작품들과 달리 목가적인 분위기를 낸 시도가 신선하다.

'멕시코 정원-전경1'(왼쪽), '멕시코 정원-전경2'

‘보트’나 ‘캠프’ 등 팀 아이텔의 여러 작품에서 보이는 특유의 뿌옇고 깊은 배경은 현대인을 둘러싼 불분명한 미래로 해석되곤 한다. 오늘 우리를 둘러싼 것들에 대한 최적의 표현이다. 불분명한 미래가 주는 불안, 마음 깊이 상처낸 혐오, 어디에나 있는 위력, 이제는 치료제 없는 바이러스까지.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상대에 맞서고 헤쳐나가야 하는 시대, 그 시대를 살아내는 사람들의 심연이다.

작품을 하나씩 눈에 담으며 다음 작품으로 걸음을 옮기다 보면, 어느새 현대미술을 이끌고 있는 독일, 그 가운데서도 라이프치히의 예술가들이 모이는 슈피너라이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에 젖는다. 가장 힙하지만 저속하지 않고, 가장 핫하지만 차분하고 서늘한 도시. 초가을 라이프치히 색깔이 물씬 풍긴다. 10월18일까지.

 

대구=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