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여 독주, 의회민주주의 위기 朴의장 중재노력 거의 안 보여 6개 상임위 위원 강제 배정도 ‘중립적 議政’ 초심 회복해야
영국에서 의회 하원의장은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공식적인 손님은 접견하지만 동료 의원들과의 사적 만남이나 식사는 금물이다. 특정 정파 모임 참가는 상상할 수도 없다. 중립성을 의심받지 않으려고 고독과 절제를 생활화한다. 국민과 의원들로부터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을 수밖에 없다. 여야 의원들의 설전으로 의사당이 소란스럽다가도 의장이 “오더(order·질서)”를 외치면 이내 조용해지는 광경에서 권위의 무게를 확인한다.
대한민국 국회의장들의 리더십은 어떤가. 대체로 대통령과 여당의 심부름꾼 역할에 충실했다. 여야의 공정한 중재자 소임을 망각하고 ‘친정’ 당에 경도된 당파적 리더십이 일반적이었다. 행정부 견제라는 국회 책무를 수행할 의지도 부족하다. 입법부 수장부터 이러니 정치 발전의 지체는 당연한 일이다. 중립적 리더십을 실천한 국회의장은 없었을까. 이만섭 전 의장은 역대 29명 국회의장 중 군계일학이다.
김환기 논설위원
“저는 앞으로 이 자리에서 의사봉을 칠 때, 한 번은 여당을 보고, 한 번은 야당을 보며, 마지막으로 국민을 바라보며 양심의 의사봉을 칠 것입니다.” 이 전 의장의 16대 국회 개원사는 언제 읽어도 명문이다. 중립성을 잃지 않고 날치기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실천으로 이어졌다. 그는 2000년 당시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이 국회 교섭단체 요건을 10석으로 완화한 국회법 개정안을 본회의에 직권상정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까지 공동 여당인 자민련의 교섭단체 등록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는데도 흔들리지 않았다. 여당 출신으로서 쉽지 않은 결단이었을 것이다.
최준영 인하대 교수 등은 2015년 발표한 논문 ‘민주화 이후 역대 국회의장의 리더십 스타일’에서 “한국 국회의장들의 리더십은 제도·정치적 요인보다 개인의 특성에 좌우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국회선진화법이 없던 시대에 굳은 결심을 하고 중립적으로 국회를 운영한 대표적 사례로 이 전 의장을 꼽았다.
한국 의회민주주의가 위기다. 여당은 176석의 수적 우세를 무기로 야당을 배제한 채 독단적으로 국회를 운영한다. 17개 상임위원장 자리를 독식했으니 하지 못할 일이 없다. 부동산 3법과 임대차 3법, 공수처 3법은 상임위 심사도 없이 처리됐다. 여당에게 민주적 절차와 관례는 ‘통법부’식 국회 운영에 걸림돌이 될 뿐이다. 여야의 협치는 기대난망 상황이다.
이런데도 박병석 의장의 중재 노력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외려 여당의 독주를 조장하고 있다는 지적까지 나오는 마당이다. 박 의장은 여야가 원 구성 합의에 실패하자 6개 상임위 위원직을 강제 배정해 국회 문을 여는 초강수를 두었다. 국회 역사상 의장이 상임위원 전체를 배정한 전례는 거의 없다.
법사위원장은 전통적으로 야당 몫이었고 야당이 전·후반기로 나누어 맡는 양보안까지 제시했는데도 여당 손을 들어주는 게 온당한가. 이러니 국회의장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싸우는 야당을 더 불리하게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 의장은 취임사에서 자칭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는 의회주의자’라고 했다. “21대 국회는 국민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잘못된 관행과 단호히 결별해야 한다”고도 했다. 기대감이 컸지만 취임사에 반하는 행보가 이어진다. 국회 불신의 중심에 국회의장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만섭 전 의장이 살아 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박 의장이 “세종 국회가 신설되면 국가 균형발전과 역할을 선도할 수 있을 것”이라며 여당의 행정수도 이전 당론에 힘을 실어준 것도 부적절하다. 국회에서 여야 간에 치열한 찬반 논쟁이 벌어질 이슈인데 중립성 위배 논란을 자초했기 때문이다. 지역구 이익이나 챙기는 국회의장으로 비칠 수 있는 실언이 아닐 수 없다.
대통령제 국가에서 국회의장이 무력하거나 편향된 리더십을 갖고 있으면 그 나라의 의회정치는 희망이 없다. ‘민주화 이후 최악의 국회의장’이라는 평가를 받지 않으려면 박 의장은 초심을 회복해 중립적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국민의 내일을 여는 국회를 만들기 위해 외로운 길을 가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