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울에 사는 직장인 박모(32·여)씨는 고민 끝에 결혼을 내년으로 미뤘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이라고 둘러댔지만, 정작 문제는 신혼집 마련이었다. 정부가 연이어 부동산대책을 내놓는 와중에도 집값이 계속 치솟고, 새 임대차법 시행(전월세상한제, 계약갱신청구권)을 계기로 전세 매물이 자취를 감추면서 전셋값마저 급등했다. 여름휴가 기간 내내 여행 계획도 취소하고 예비 신랑과 공인중개업소를 돌아다니며 전셋집을 찾아 나섰지만 결국 허탕을 쳤다. 박씨는 “마포구를 거쳐 서대문구, 은평구 일대를 부지런히 다녔는데 마음에 드는 집을 찾지 못했다”며 “애초 전세 자체가 귀한 데다가 겨우 매물이 나와도 집을 보기도 전에 바로 계약하는 사람들한테 밀려서 구경도 하기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2. 경기 수원에서 대기업에 다니는 강모(33)씨는 올해 5월 파혼을 경험했다. 3년의 연애기간에도 크게 다툰 적 없던 여자친구와 틀어진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신혼집 때문이었다. 강씨와 여자친구는 각자 직장생활을 하면서 모은 적금과 양가 부모 도움을 받아 주택자금으로 4억원을 마련했다. 일부 은행 대출을 끼고 수원시 영통구의 신축 대단지 중형 아파트(84㎡)를 구매하려던 계획이었다. 지난해 12·16 부동산대책의 풍선효과로 인근 아파트값이 폭등하면서 당초 6억∼7억원대에 거래되던 매물이 2월 들어 10억원까지 치솟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20 대책에 따라 비규제 지역이던 영통구가 조정대상지역으로 묶여 버렸다. 강씨는 “규제로 주택담보비율(LTV) 30%(9억원 초과분 해당)를 적용받는 바람에 대출을 한도 끝까지 받아도 돈이 모자랐다”면서 “부모님은 아파트보다 저렴한 빌라를 구입하자고 하셨고, 여자친구 측은 점 찍어둔 아파트에 전세로 들어가야 한다면서 의견 충돌이 잦아졌고 결국 결혼 약속마저 깨지고 말았다”고 말했다.
◆부동산대책 유탄 맞은 신혼부부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스무번 넘게 부동산대책이 쏟아져 나오면서 대표적인 주택 실수요자층인 신혼부부들이 유탄을 맞고 있다. 어렵게 상대를 구해 결혼을 눈앞에 뒀는데 정작 둘이 들어가 살 집을 구하는 게 마땅치 않다. 모아 둔 돈은 넉넉하지 않고 청약가점은 낮은 데다가 신혼부부를 위한 특별공급 물량을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형편이다.
◆집 구하기 겁나는 요즘 신혼부부
11일 KB부동산 리브온에 따르면, 올해 2분기 서울의 아파트 PIR(소득 대비 주택가격 비율)는 11.4로 집계됐다. 중산층이 가구소득을 한푼도 쓰지 않고 11.4년을 모아야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할 수 있다는 뜻이다. 자연스럽게 결혼을 앞둔 신혼부부들이 주택 마련에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됐다.
결혼정보업체 듀오가 지난달 21일부터 25일까지 20∼30대 무주택 미혼 남녀 3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 10명 중 6명(58.0%)은 10년 이내에 내 집 마련이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이유를 물었더니 ‘계속 치솟는 집값’(74.7%, 복수응답)을 꼽은 사람이 가장 많았고, ‘낮은 소득’(62.6%)과 ‘치열한 청약 경쟁’(19.0%), ‘부모의 경제적 지원 불가’(10.9%) 등이 뒤를 이었다.
◆청약 불리한데 특공 기준도 불공평
내년 결혼을 계획 중인 정모(35)씨는 신혼집 마련을 위해 아파트 청약정보를 알아보다가 상심하고 말았다. 대학생 때부터 15년간 유지한 청약통장이 있지만 당첨권과 거리가 멀어 청약신청을 포기했다. 지난 7~8월 서울 신규 아파트 당첨자의 평균 최저 청약가점은 60.6점으로 집계됐다. 반면 정씨는 통장 가입기간 17점(15년 이상 만점), 무주택기간 12점(30세부터 연간 2점)을 합쳐 총점이 29점에 불과하다.
신혼부부를 위한 특별공급 물량이 있긴 하지만 자녀가 없는 정씨는 1순위 대상이 아니다. 특공의 소득기준이 까다로운 탓에 금수저만 혜택을 본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나마 최근 완화된 기준을 적용해도 분양가 6억∼9억원 민영주택을 기준으로 도시근로자 월평균 소득 130%(569만원)까지, 맞벌이는 140%(613만원) 이하를 충족해야 한다. 2018년 통계청 기준 대기업 근로자의 평균소득이 501만원, 중소기업은 231만원인 만큼 중산층 맞벌이 가구는 신혼부부 특공 대상에 들어가기 어려운 셈이다. 막상 요건을 충족한 저소득층 가구는 수억원의 분양가를 마련하기 힘들 수밖에 없다.
정씨는 “일반 청약은 가점 방식 때문에 30대가 아예 당첨될 수 없게 해놓고, 신혼부부를 비롯한 특공 방식은 맞벌이를 할 필요 없는 금수저나 현금부자에게만 유리한 구조로 만들어 놨다”며 “정부가 30대에게 청약하지 말고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은) 대출’로 집을 사라고 부추기는 꼴”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부 대책 소외된 30대가 앞다퉈 주택 매입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 갓 결혼해 내 집 마련을 꿈꾸는 30대 실수요자들의 불안감은 패닉바잉(공황구매)으로 이어졌다. 정부가 까다로운 규제를 내놓을수록 이들은 “더 늦으면 영영 집을 살 수 없다”는 심리로 주택 매매시장에 뛰어들면서 집값이 잡히지 않는 악순환이 반복된 것이다.
한국감정원의 월별 매입자 연령대별 통계에 따르면 7월 서울 아파트 매매 건수(1만6002건) 가운데 30대 이하의 비중은 36.9%(5871건)로, 지난해 1월 집계가 시작된 이래 가장 높았다. 경기도 역시 30.1%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경제적 기반을 갖추지 않은 상황에서 주택을 구매하다 보니, 부모님의 증여를 받지 못하면 대출을 받을 수밖에 없다. 최근 1년간 30대 이하가 빌린 주택담보대출액은 58조8000억원으로, 직전 1년(43조9000억원)과 비교하면 15조원 가까이 급증했다.
내년 봄에 결혼을 계획 중인 A(32)씨도 최근 패닉바잉 행렬에 동참했지만 “후회는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청년 장기임대주택에 당첨돼 입주를 앞둔 상황이었지만, 과감하게 포기하고 대출을 끌어모아 지난 5월 서울 성북구에 중소형 아파트를 샀다. A씨는 “임대주택도 보증금을 구하려면 어차피 대출이 필요한 상황이었고, 거기에 매달 지불하는 관리비 등 수수료까지 따져보니 차라리 집을 사서 주택담보대출을 갚아 나가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섰다”고 말했다. 결정적으로 8년의 임대기간이 지난 뒤 다시 주거불안에 시달릴지 모른다는 걱정이 컸다고 한다. A씨는 “요즘 주변 단지에 매물이 아예 사라진 것을 보면 그때 집을 사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덧붙였다.
◆공급 대책으로 패닉바잉 잦아들까
정부는 지난 8일 하남 교산 등 3기 신도시를 비롯한 공공분양 6만가구를 내년 하반기부터 조기 공급하기로 하고, 지구별 사전청약 일정을 공개했다. 수도권 중에서도 비교적 입주여건을 갖췄고, 분양가가 저렴한 편에 속하는 공공분양 물량을 앞세워 30대 패닉바잉을 잠재우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정부는 이미 7·10 대책으로 30대 실수요자들의 공공분양 문턱을 낮춰 놓았다. 생애 최초 특공 비율을 20%에서 25%로 늘리고, 신혼부부 특공은 소득기준을 도시근로자 월평균 소득 130%에서 120% 미만으로 완화한 것이다. 이에 따라 무주택 기간이 짧고 가구원 수가 적은 30대에게도 청약의 문은 열려 있다. 권대중 명지대 교수(부동산학)는 “형평성 문제로 젊은층이나 신혼부부용 주택 비율만 계속 늘리는 데는 한계가 있다”면서 “정부가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주요 입지에 실수요자들의 눈높이에 맞는 주택을 꾸준히 공급하겠다는 메시지를 줘야 패닉바잉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세준 기자 3ju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