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수룩한 수염, 길게 자란 머리, 굵은 뿔테 안경. 방금 전까지 작업을 하다 나온 듯 앞치마를 두른 그의 모습은 한눈에도 예술가인지 알겠다. 그리고 오른쪽 팔뚝에 쓰인 영문 ‘flying donkey(플라잉 동키)’와 앙증맞은 당나귀 그림. 팔뚝뿐이 아니다. 샤갈의 마을에 들어선 듯, 그의 갤러리에는 온통 푸른 당나귀가 넘쳐난다. 독특하고 뚜렷한 자신만의 예술세계가 돋보이는 작가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도자예술의 요람을 꿈꾸는 예술가들이 모여 만든 경기도 이천도자예술마을 예스파크 김순식(59) 대표. 지난 17일 이천의 갤러리 더 화에서 그를 따라 도자예술의 매력적인 세상으로 들어가 봤다.
#이상향을 찾아 날아오르는 당나귀처럼
#행복의 짐꾼이 꿈꾸는 도자예술의 요람
실제 그는 무겁지만 행복한 짐을 짊어지고 있다. 바로 이천도자예술마을 예스파크 대표 자리다. 사실 김 대표는 한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중국 도자회화 기법을 전수받아 중국 정부로부터 ‘고급공예미술사’ 자격증을 받은 국내 도자회화 분야 일인자다. 도자에 전통과 현대 회화기법을 접목하는 도자회화는 중국이 처음으로 시작했고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된다. 광주요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있던 1999년 중국 장시성 징더전(景德鎭) 도자연구원에 교환연구원으로 파견되면서 도자회화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됐다. 이때 옛 도자기 공장을 리노베이션해서 만든 세계 최고의 도예마을 타오시촨(陶溪川)을 둘러보면서 도예의 역사가 깊고 수준도 뛰어난 우리나라도 타오시촨 같은 도예마을을 만들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중국 민간 투자로 만든 타오시촨은 작가가 도공이 아닌 아티스트로 최고의 대우를 받는 작가들의 천국입니다. 수백년동안 문화예술인으로 존중했기에 작가가 우선이죠. 작업공간 임대료도 매우 저렴하고 작품의 마케팅과 유통까지 지원됩니다. 타오시촨을 포함해 징더전에는 도예인만 100만명에 달하고 중국의 유일한 4년제 도자대학도 이곳에 있습니다. 작업환경이 좋고 시장이 넓으니 유럽 등 전세계의 갤러리스트가 타오시촨으로 몰리게 됩니다. 유럽과 일본, 동남아, 심지어 아프리카에서 온 수많은 외국 작가들이 상주하면서 서로 교류하고 작품 활동을 하는 덕분에 타오시촨은 세계 최고·최대 도자예술의 요람이 됐습니다.”
이를 모델 삼아 예스파크가 탄생했다. 2004년 이천도자기조합에서 도예인을 한곳에 모으는 예술단지가 필요하다는 점에 공감한 몇몇이 모여 시작했다. 220여개 공방의 조합원들이 500억원을 투자해 현재 경기도 이천시 신문면 땅 43만㎡(13만평)을 매입했고 경기도와 이천시는 이곳을 도자산업특구로 지정했다. 이천시가 200억원을 투자하고 경기도 50여억원, 중앙정부 20여억원의 지원을 보태 진입도로 등 기반시설을 마련해 사업을 추진한지 13년만인 2017년 드디어 예스파크가 탄생했다.
“도예인들은 작업 환경이 아주 열악해요. 작품활동에 필요한 공간 마련도 어렵고 작품을 유통할 방법도 찾기 힘들죠. 이 때문에 늘 공예단지를 만들고 싶어했죠. 작업장과 전시장을 갖춘 좋은 환경에서 주거하며 마케팅까지 원스톱으로 이뤄지는 국내 최대이자 동양 최대의 도자예술을 마을 목표로 예스파크를 조성한 겁니다.”
25년 동안 주로 중국에서 활동한 김 대표는 타오시촨에 작업장을 둬 누구보다 도자예술을 잘 알고 있고 도자회화의 국내 1인자인 만큼 자연스럽게 2019년 3월부터 타오시촨을 벤치마킹한 예스파크를 이끄는 대표를 맡게 됐다. 하지만 고군분투 중이다. 아직 공방들이 모두 입주하지 않아 공터가 많고 호텔과 컨벤션센터 등 대규모 도자예술 행사를 기획할 인프라가 크게 부족하기 때문이다.
“현재 예스파크에는 도자뿐 아니라 다른 공예를 하는 분들도 많아요. 순수회화, 조각, 옻칠, 금속, 의류, 유리, 가죽, 목공 등 다양한 예술가들이 입주하고 있습니다. 이곳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예술마을로 만들 조건은 이미 갖췄어요. 하지만 홍보와 마케팅이 미흡해 제대로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답니다. 미분양, 미건축 공간과 공실을 채워 활성화시키고 숙박시설을 서둘러 마련해야 하는데 생각만큼 진행되지 않네요.”
#물건 파는 상인이 아니라 예술가들이다
정부를 향한 섭섭한 마음도 털어놓았다. 김 대표는 외국작가와 갤러리스트를 끌어들여 유럽, 미국으로 이어지는 공예산업의 플랫폼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공예허브단지를 꿈꾼다. 하지만 아직 정부는 예술가라기보다는 단지 물건을 파는 상인으로 보는 시각이 강하다. 이 때문에 문화지원정책 사업이 아닌 소상공인 지원 정도에 머물고 있어 도예가들이 모여 사는 단순한 마을로 변질될까 걱정이다.
“1순위로 추구하는 과제는 세미나·워크숍·전시 등을 여는 국제공예문화아트센터 건립입니다. 타오시촨에서는 아침에 밤샘 작업한 외국 작가들이 옷에 흙을 묻힌 채 자전거를 타고 다녀요. 중국 작가와 외국 작가들이 아침밥을 같이 먹고 저녁에 술도 한잔 하면서 소통하며 작품활동을 하죠. 예스파크도 이렇게 만들려면 외국인들을 끌어들이고 그들이 다시 외국으로 나가 한국의 도자예술 작품을 전세계에 마케팅할 수 있도록 정부의 조직적인 지원이 필요해요. 이를 위해선 국제적인 컨벤션센터가 들어서야 합니다. 하지만 중앙정부와 지자체 이해관계가 복잡해 추진이 쉽지 않은 상황이에요.”
김 대표는 적합한 부지 2640㎡(800여평)에 국제컨벤션센터를 세워 달라고 시 담당자에게 사업계획서를 제출하고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100억원 이상 드는 사업이라 당장은 어렵더라도 화두를 던져 놓은 만큼 다음 대표들이 사업 의지를 이어가면 언젠가는 건립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이보다 급선무는 많은 이들이 찾을 수 있도록 타오시촨처럼 예스파크의 경관을 꾸미는 일이다. 이를 위해 경기관광공사 ‘구석구석 골목 테마 활성화 지원사업’에 공모해 선정됐다. 1억8000만원을 지원받는 사업이다. “도자예술마을이지만 현재로선 공방 건물들만 예술적으로 잘 지어진 정도예요. 골목골목 아트적인 요소의 조형물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특히 건물 외벽에 LED 조명을 비춰 영상을 표현하는 미디어 파사드가 예스파크를 활성화하는 데 매우 효과적입니다. 아름다운 조명과 영상만큼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이 없죠. 작더라도 감동 있는 랜드마크를 조성해놓으면 사람들이 찾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설치작업은 안 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어쩔 수 없이 이를 제외한 채 공모에 선정됐다. “야간플리마켓도 만들려고 했죠. 주변의 소상공인들을 끌어들여 다양한 이벤트를 마련하면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큰 도움이 될 텐데 이런 아이디어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더군요. 인삼즙에는 최소한 인삼이 60%는 들어가야 인삼즙이지 다른 것을 넣으면 인삼즙이 아니죠. 우리는 오랫동안 예스파크 활성화를 위한 아이디어를 고민했고 이를 절실하게 요구했는데 이미 짜 놓은대로 움직여라 뭐 이런 식이에요. 에술가들은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이들인데 통제하려고만 하니 답답하네요.”
#플라잉 동키의 꿈은 ‘깊은 사유’
예스파크는 민간과 중앙정부, 지자체가 힘을 합쳐 한국 도자산업을 발전시키려고 만들어 놓은 단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문화예술의 집약체가 아닌 단순한 소상공인 시장 정도로 취급되다보니 지자체의 관심은 점점 줄어든다. 예스파크 활성화가 예상보다 늦어지면서 건물을 직접 지은 공방들은 은행 빚만 늘고 있다. “공무원들이 예스파크를 어떤 개념으로 보느냐에 따라 정책과 예산이 달라지는데 그냥 단순한 마을로 보는 것 같아 매우 아쉬워요. 매일 작가들이 만나서 공예산업 발전방안을 토론하고 다양한 전시회도 열 수 있는 환경 조성이 절실합니다. 빨리 마을이 활성화돼서 주말마다 많은 이들이 찾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찾아올 매력적인 뷰가 형성돼야 하고 맛집도 늘어나야 합니다.”
듣고 보니 아직 갈 길이 멀다. 다시 그의 작품세계로 따라간다. 그는 도자예술을 집대성한 책을 집필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은 단국대 도예학과에서 올해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이를 마치면 원래 그의 전공인 고구려 고분 벽화를 살려 프레스코화로 돌아갈 계획이다. “1992년 대영박물관에 한국관이 조성될 때 고구려 고분벽화 청룡도 재현작업에 참여했어요. 주 전공인 프레스코 벽화를 도자기와 융합한 실험적인 작업을 25년 동안 했는데 공예적인 요소가 강하더군요. 작가는 자신의 철학적인 사관을 만들어야 하고 마지막에 일생 동안 추구한 작품세계의 발자취가 남아있어야 해요. 모든 작가들이 다 같은 생각일 겁니다. 추상표현주의 아버지 마크 로스크처럼 형체 없이 색상만으로 이루는 작품세계를 존경해요. 방을 하나 만들어 단색으로 질감과 톤을 표현할 겁니다. 인간이 깊은 사유를 할 수 있는 공간, 플라잉 동키의 다음 꿈이랍니다.”
이천=글·사진 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