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뜻 허무맹랑하고 고리타분한, 오래되어 사라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으나 ‘신화(神話)’는 지금도 우리 일상 깊숙한 곳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인어의 모습을 한 세이렌 여신(스타벅스)과 정복과 승리의 여신 니케(나이키), 뱀의 머리를 가진 메두사(베르사체), 포세이돈의 삼지창(마세라티)처럼 신화적 모티프가 상업적으로 활용된 사례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종교와 예술의 영역을 넘어 기업들마저 신화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것이 지금도 강한 소구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브랜드 마케터들의 말처럼 신화적 상징은 소비자들의 무의식에 영향을 끼친다. 현대인들은 왜 까마득히 먼 옛날 이야기에 불과한, 거칠게 말해 미신이나 다름없는 신화에 끌리는 걸까.
20세기 가장 위대한 신화학자인 조지프 캠벨의 강연들(1958∼71년)을 한데 묶은 ‘다시, 신화를 읽는 시간’(권영주 옮김·더퀘스트)은 이를 이해할 단초를 제공한다. 캠벨은 “꿈은 개인의 신화이고, 신화는 집단의 꿈”이라 말하는데, 이를 풀어 얘기하면 고래로부터 이어져 온 인류의 ‘꿈’이 신화에 녹아 있다는 것이다. 고대인들의 꿈인 신화는 동시에 현대인의 꿈이기도 하다.
◆신화, 내면이 만든 세계
그렇다고 신화의 외형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신화적 질서’는 환경에 기반한다. 남성 구성원의 역할이 큰 수렵부족의 신화가 동물숭배적인 것과 달리, 열대밀림의 신화는 식물과 여성, 재생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밀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패 식물에 새싹이 돋는 현상에서 비롯된 ‘죽음이 삶을 가져온다’는 믿음은 수천년간 이어진 인신공양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이런 신화적 상징들은 종교와도 맞닿아 있는데, 캠벨이 큰 틀에서 종교와 신화를 묶는 핵심은 ‘영혼의 풍경’이다. 가령 기독교에서 말하는 ‘에덴동산’은 유사 이전의 실제 사건이 아니라 ‘영혼의 풍경’, 그러니까 인간 내면의 영적 상태에서 근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조현병 환자가 체험하는 이른바 ‘내적 낙하’에서 힌두교와 불교, 이집트 및 고대 그리스·로마 신화의 이미지가 발견되는 이유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세계 각국에서 유사한 형태의 신화적 사고나 신화적 원형이 나타나는 것은 그다지 이상하지 않은 일인 셈이다. 현대 과학이 대신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고유한 정신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이 캠벨의 시각이다.
◆“신화는 살아 있는 이야기”
왜 지금 신화를 이해하는 일이 중요할까.
캠벨은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카를 융의 설명을 빌려 인간 영혼에 보편적으로 존재한 어떤 ‘힘’이 신화 속에 담겨 있는데, 현대인이 이를 올바르게 해석하면 인간 내면의 힘과 연결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캥거루 주머니’ 비유를 들며 종교가 인간을 유년기에 머무르도록 하는 측면이 있다고 본 반면 신화는 가상의 사회 영역이 아닌 현실세계에서 이성적으로 기능하는 성인이 되도록 미성숙한 정신을 길러준다고도 보았다. 신화를 자연스러운 인간 성장 과정의 일부로 여기는 셈이다. 그는 “신화는 제2의 자궁에 못지않게 없어서는 안 될 생물학적 기관이고 자연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꼭 종교나 심리적인 접근이 아니더라도 신화에 대한 통찰은 현재를 이해하는 데 여러모로 도움을 줄 수 있다. 가령 세계적인 흥행을 거둔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 어벤져스 시리즈를 뜯어보면 모두 ‘출발(Departure)→입문(Initiation)→귀환(Return)’이라는 영웅 신화의 구조가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신화가 소구력 있는 스토리텔링의 질료로 쓰인 것이다. 때로 신화는 인간이 겪는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거나 언어를 초월한 인간 내면을 인식하도록 돕기도 한다. 죽음과 늙음, 사랑 등 인간 삶의 본질은 수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화학자들이 “신화는 살아 있는 이야기”라고 하는 것이다.
이창수 기자 winteroc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