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의 자유, 열대의 섬에서 빗장 열다 [김한들의 그림 아로새기기]

(43) 폴 고갱의 타히티
20대 후반 들어 늦깎이 그림 배워
인상파 소장가로 먼저 이름 알려
생활 곤궁해지자 전업작가 나서
“문명 껍질 벗기고 싶어” 타히티행
원주민 건강함·열대의 밝음에 영감
강렬한 색채로 현대 회화 진전시켜
폴 고갱이 타히티 섬 이주 초기에 그린 작품. 그는 이곳의 자연과 원주민에게서 성모 마리아만큼의 순수성을 보았다. ‘마리아를 경배하다(Hail Mary)’(1891).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제공

◆가을 하늘에서 받는 지난여름의 보상

이렇게 파란 가을 하늘을 보는 것이 얼마 만일까? 하늘과 구름의 조화가 만들어 내는 아름다움이 매일 펼쳐지고 있다. 최근 몇 년간은 보기 힘들었던 맑고도 투명한 모습과 장면들이다. 실제 올해 초미세먼지주의보는 작년 대비 4분의 1 수준으로 급감했다. 지난해 미세먼지 추경의 효과인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따른 영향인지 정확한 원인은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 작년 이맘때 황사 영향으로 뿌옇게 변했던 공기의 모습은 더 없다.



덕분에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멈춰 있는 시간이 늘었다. 유난히 고단했던 지난여름을 보상받는 기분도 든다. 코로나19, 장마, 태풍 등의 기세에 잔뜩 풀이 죽은 채 눅눅하게 보낸 계절이었다. 그 계절이 지금의 시원한 바람과 따듯한 해에 산뜻하게 마른다. 깨끗한 자연만큼 인간에게 큰 위로가 되는 존재는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그리고 고갱이 타히티에 살던 시절, 그곳의 날씨가 이렇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폴 고갱의 삶과 예술 그리고 여행

외젠 앙리 폴 고갱(Eugene Henri Paul Gauguin)은 남태평양 타히티 섬에서 그린 강렬한 색채의 그림으로 기억되는 화가다. 그는 일찍이 미술에 재능을 보이거나 정식으로 교육을 받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누구보다 회화에 열정적이며 실험적이었고 그것은 고스란히 작업에 드러났다. 그가 20세기 미술에 영향을 미친 작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이유다.

폴 고갱은 1848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정치부 기자였던 아버지의 상황이 프랑스 혁명으로 쉽지 않은 때였다. 페루로 이민을 떠났지만, 그의 아버지는 도착하기도 전에 여객선에서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결국, 가족은 5년여의 세월이 지난 뒤에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오를레앙에 정착했다. 가난하고 고단했으나 고갱은 성장했고 선박의 사관후보생이 되었다.

고갱의 삶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달라졌다. 그는 안정적인 생활을 마련하려 증권거래소에서 일을 시작하고 결혼을 했다. 윤택한 생활이 자리 잡으며 그림과의 이야기가 시작했다. 소장가로서 그림에 관심을 두고 인상파 작품을 중심으로 모은 것이다. 이십대 후반에 들어서는 회화 연구소에 다니며 그림을 배우게 되었다. 자기가 그린 작품을 살롱에 출품하며 작가 동료들과 관계를 맺었다. 인상파의 단골 소장가에서 주요 구성원으로도 자리 잡았다.

그림과 관련한 삶은 즐거웠으나 생활은 어려워졌다. 프랑스 주식 시장이 붕괴하며 그의 직업도 불안해졌다. 회사를 그만두고 그림을 그리고 판매하는 전업 작가로 나섰다. 그림 판매는 예상보다 어려웠고 삶을 겨우 연명했다. 전시에서도 신인상주의 화가들의 빛에 가려 주목받지 못했다. 파리의 생활에서 지칠 대로 지쳐 도시를 떠나고자 마음먹었다.

고갱이 파리를 떠나 자리 잡은 곳은 프랑스 북서부에 있는 퐁타방이었다. 목가적이며 전통적인 분위기에서 생활하며 그의 마음은 안정을 찾았다. 고흐와 아를에 머물기도 했지만, 다시 퐁타방으로 돌아온 이유다. 그는 여기서 만난 작가들과 기존 인상주의 작업 방식에서 벗어난 새로움을 찾았다. 시각적 재현을 뛰어넘어 주관적 감정까지 경험의 종합을 다루기 시작했다. 이렇게 내면까지 상징적으로 표현하며 윤곽선과 색채는 대담하게 변했다. 형과 색은 재현의 의무에서 벗어나 자율적인 조형 요소로 재탄생했다.

고갱은 이러한 종합주의 작업으로 파리 아방가르드 화단에서 주목을 받았다. 1889년 파리만국박람회에 작품을 출품하게도 되었다. 그리고 전시를 위해 찾은 이곳에서 거부할 수 없는 끌림을 느낀다. 아시아와 남태평양의 이국적인 풍물에서 매력을 발견한 것이다. 퐁타방이 번잡해지며 더 한적한 곳을 찾아 바닷가 마을로 이사를 한 상태였다. 자기가 지친 도시와 사람으로부터 멀리 있는 미지의 세계에서 온 것들이었다.

그는 이러한 세계를 향한 동경과 함께 문명 세계에 혐오를 느끼기 시작했다. 도시를 벗어나 열대 지방으로 떠나기 위한 구체적 계획을 세웠다. 작품을 모두 처분해 여행 자금을 마련했고 곧 실행에 옮겼다. 마르세유에서 출항하여 남태평양의 타히티 섬으로 떠났다. 사관후보생으로 직업을 얻고자 배에 올라탔을 때와는 다른 경험이었다. 이때까지 쌓은 모든 것을 남겨둔 채 삶과 회화의 자유를 향해 떠나는 일이었다.

폴 고갱이 그린 타히티 섬의 풍경. ‘타히티 풍경(Tahitian Landscape)’(1892).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제공

◆오직 마음을 듣고 원주민이 사는 대로

“나는 평화롭게 살기 위해, 문명의 껍질을 벗겨내기 위해 떠나려는 것입니다. 나는 그저 소박한, 아주 소박한 예술을 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염되지 않은 자연에서 나를 새롭게 바꾸고 오직 야성적인 것만을 보고 원주민들이 사는 대로 살면서, 마음에 떠오른 것을 마치 어린아이처럼 전달하겠다는 관심사 말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고갱이 파리를 떠나며 기자에게 남긴 말이다. 그는 마음이 말하는 소리, 회화가 말하는 소리를 온전히 듣고자 타히티에 도착했다. 그 소리를 통해 때 묻지 않은 자기 본연의 모습을 새롭게 발견하고자 했다. ‘이아 오라나 마리아’(1891)는 타히티에 도착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그린 작품이다. ‘이아 오라나 마리아’는 타히티 원주민 말로 “나는 마리아를 경배한다”는 뜻이다.

화면의 우측에는 한 여인이 어린아이를 목말 태우고 있다. 자애로운 미소를 짓는 이 여인이 마리아고 어깨 위의 아이가 예수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사람들은 두 손을 모은 채 이 평화로운 모습을 바라본다. 그들의 두 손에는 마리아와 예수를 향한 경배와 찬양이 담겼음을 알 수 있다. 그 뒤에는 천사가 날개를 펼쳐 화면 속의 모든 존재를 보호하는 듯하다.

이야기를 듣고 보면 서구 기독교 문화의 도상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인물들의 화려한 파레오(꽃문양의 면포)와 배경의 열대 식물을 보면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보통 이 장면에는 후광(halo)이 등장하는 등 전형적인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참된 신이며 인간이고 순결한 어머니이며 처녀다. 고갱은 인류의 근원을 타락한 서양 국가가 아니라 오염되지 않은 타히티 원주민에게 찾고자 했다. 성모 마리아를 재해석하여 가장 순수한 상태의 고결함을 표현했다.

퐁타방에서 시작한 그만의 회화적 특징은 여기서도 보인다. 단순한 윤곽선은 인물을 상징적으로 강조한다. 그 안을 채우는 강렬한 색채의 사용은 당시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서는 경험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고갱은 이 색채 효과를 더 강조하기 위해 원근법과 명암법의 사용은 전면 배제했다. 피카소 등이 영향을 받아 현대 회화를 진전시킬 수 있었던 부분이다.

폴 고갱은 타히티를 널리 알리기 위해 돌아간 파리에서 목판화 작업을 시작했다. 목판화 작업은 한동안 이어졌다. ‘미소지어; 타히티(Smile; Tahiti)’(1899).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제공

고갱은 타히티 섬에서 원주민의 건강함과 열대의 밝음을 느꼈다. 그것들은 그의 예술을 자유롭게 했지만 삶은 여전히 쉽지 않았다. 그는 여기서 다시 한번 가난과 빈곤, 고독을 만나 시달리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파리로 돌아가 타히티에서 그린 그림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관심을 끄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작품 판매에는 크게 실패했다.

고갱은 그런데도 타히티를 알리기 위해 목판 작업과 글 쓰는 작업을 지속했다. 일 년여의 시간이 지난 뒤에는 다시 타히티로 돌아갔다. 전시에 실패하며 어쩔 수 없이 파리를 떠나야 했을 수도 있지만 그는 원시성이 주는 힘과 깨달음은 그럴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마치 맑은 하늘이 눈앞에 있는 지금 이 소중함을 더 간절히 느끼듯이 말이다. 고갱은 돌아간 타히티에서 매독과 영양실조로 건강 악화를 거듭하고 생을 마감했다. 죽기 전에 남긴 마지막 대작의 제목은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1897~1898)이다.

김한들 큐레이터/국민대학교 미술관, 박물관학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