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여 수사했는데 기소도 못 하고 힘만 빠져요. 형사처벌할 게 아니라 민사로 해결하면 수사력 낭비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검사는 명예훼손 수사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이같이 말했다.
12일 법무연수원이 최근 발표한 2019 범죄백서에 따르면 2018년 컴퓨터 범죄 중 특별범죄(정보통신망법, 개인정보보호법)에 해당하는 명예훼손 사건은 1만839건 발생했다. 이는 같은 해 일어난 2만2619건의 컴퓨터 범죄 가운데 47.9%를 차지한다. 온라인 명예훼손 자체의 증가 속도도 빠르다. 온라인 명예훼손 사건은 2014년 5942건 발생한 이후 4년 새 82% 늘어났다. 법무연수원은 “악성댓글 게시 등 명예훼손 사례가 만연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검찰이 기소했어도 ‘공공의 이익에 관할 때’에는 처벌하지 않는다는 규정이 있어 실형으로 이어지기 더 어렵다. ‘배드파더스’의 운영자 구본창씨는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됐지만 1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구씨는 2018년 양육비를 주지 않는 부모 400여명의 신상을 공개했고 지난해 5월 개인정보가 공개된 5명이 구씨를 고소했다. 원치 않는 사실이 공개된 피해자들로선 펄쩍 뛸 일이겠지만 법원은 ‘양육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진 상황에서 피고인의 활동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배드파더스에는 양육비를 주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부모 사진 등이 여전히 공개된 상태다.
지난 9일에는 서울 강남의 한 성형외과를 ‘유령병원’이라고 폭로했다가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의사가 1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이 의사는 인터넷 게시판에 A성형외과를 지목하며 “환자로부터 수술 동의를 받은 의사가 아닌 간호조무사 등이 마취 중인 환자를 수술시켜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취지의 글을 올렸다. 법원은 A성형외과에서 수술 중 뇌사 상태에 빠진 사건이 발생했고 해당 의사가 대리수술로 유죄를 받았던 점을 근거로 제시하며 죄가 없다고 봤다. 역시 공익을 위한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세상을 시끄럽게 한 ‘디지털 교도소’ 사건은 향후 논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디지털 교도소 운영자 B씨는 지난 8일 구속됐다. B씨는 176명의 신상을 무단으로 공개해 명예훼손과 개인정보 보호법,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 등을 받고 있다. B씨는 ‘성범죄 가해자들이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 있는 만큼 이들에게도 피해자 같은 고통을 줘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B씨가 기소된 이후 법원이 ‘공익’을 이유로 명예훼손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무죄가 나올 경우 고소·고발인은 무고죄로 반격당할 수 있다. 명예훼손은 2년 이하의 징역과 500만원 이하의 벌금으로 처벌하게 돼 있지만, 무고의 경우 10년 이하 징역 또는 1500만원 이하의 벌금이 내려질 수 있다.
법조계에서는 사실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관련 법률이 개정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수사력 낭비는 물론 헌법상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검사는 “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죄가 있는 국가는 우리나라를 포함해 독일과 일본 정도뿐”이라며 “사생활이 침해됐거나 적시된 내용이 불편할 경우 민사를 통해 해결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
반대 의견도 있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2005년 일어난 ‘개똥녀’ 사건처럼 무분별한 신상털기가 발생할 수 있다”며 “인격권 보호를 위한 장치는 유지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논란 속에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문제는 결국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구하고 있다.
2017년 한 시민은 치료받은 반려견이 실명 위기에 놓이자 수의사의 잘못된 의료행위를 구체적으로 공개하려고 했지만 사실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했다. 헌법상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가 침해됐다는 것이다. 헌재는 지난달 이 문제에 대한 공개변론을 진행했다. 공개변론에서는 인격권 역시 헌법상 보호해야 할 중요한 기본권이라는 입장과 진실이 가려진 채 형성된 명예가 있다면 이는 허명이고, 표현의 자유를 막으면서까지 가짜 명예를 지켜줘야 할 이유가 없다는 의견이 첨예하게 맞섰다.
정필재 기자 rush@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