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도전 만에 미국 대권을 거의 움켜쥔 조 바이든은 78년 삶의 3분의 2가량을 정계에서 보냈다. 변호사 시절 민주당 지역 모임에서 활동하다 1970년 델라웨어주 뉴캐슬카운티 의회에 입성한 것이 정치 인생의 시작이었다. 2년 뒤에는 공화당 3선 현역 의원이 버티고 있어 민주당에서는 아무도 나서지 않으려는 주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며칠 뒤 만 30세 생일이 지나서야 상원의원 취임 선서를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췄을 정도로 젊은 나이였다.
1942년 아일랜드 혈통의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0살 때 고향인 펜실베이니아주 스크랜턴을 떠났다. 부친이 델라웨어주 윌밍턴에서 자동차 세일즈맨 자리를 얻으면서였다. 유년 시절 말더듬증이 심했지만, 조약돌을 입에 넣고 발음 연습을 한 노력과 가족의 격려로 극복했다. 어려서부터 정치를 소명으로 품은 그는 ‘흙수저’ 출신이 정치인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처럼 보였던 변호사로 진로를 정했다.
대선에 처음 도전한 1988년 무렵 그는 소수자·하층민이 ‘딛고 설 수 있는 발판’을 정치가 제공해줘야 한다는 영국 노동당 닐 키넉 대표의 광고에 매료됐다. “왜 조 바이든은 가족 중 처음으로 대학에 갔을까”라고 연설을 시작하며 광고 내용을 유세장에서 인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출처를 밝히지 않는 바람에 표절 시비가 불거지자 민주당 대선 경선 레이스에서 하차한다. 얼마 뒤에는 뇌동맥류로 쓰러져 사경을 헤매는 위기를 겪었다.
2008년 두 번째 대선 도전은 혜성처럼 등장한 젊은 흑인 정치인 버락 오바마에 가로막혔다. 하지만 그의 경험과 연륜을 높이 산 오바마의 러닝메이트로 지명돼 8년간 부통령을 지냈다.
그는 델라웨어주 법무장관을 지낸 큰아들 보를 자신의 정치적 후계자이자 분신처럼 여겼으나, 보는 2015년 뇌종양으로 세상을 등졌다. 이때 받은 충격으로 2016년 대선 출마를 포기했다. 둘째 아들 헌터는 바이든의 아픈 손가락이다. 변호사 활동을 하다 2001년 로비스트로 변신한 헌터는 마약, 형수와의 불륜 등 각종 추문에 휩싸였다. 헌터가 일하던 우크라이나 에너지회사에 대한 검찰 수사를 2016년 부통령이던 바이든이 압력을 가해 막았다는 의혹도 불거졌다.
여동생 밸러리는 바이든의 가장 든든한 우군이자 책사로 꼽힌다. 바이든은 학창 시절 버스에서 부적절한 행동을 한 밸러리를 차마 고발할 수 없어 선도부원 배지를 반납했다. 밸러리는 그런 오빠가 카운티 의원에 출마했을 때부터 모든 선거운동에 관여하며 궂은일을 도맡았다. 이번 대선에서는 2선으로 후퇴했으나, 경선 초반 저조한 성적으로 낙담에 빠진 오빠의 자신감을 북돋웠다. 밸러리의 남편은 바이든의 대학 시절 가장 친한 친구 잭 오언스다.
유태영 기자 anarchy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