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김정희는 ‘세한도’를 그렸다. “우선(제자인 이상적의 호), 이것을 보게.” 제목 옆의 짧은 글에서 창작 이유가 드러난다. 이상적은 그림을 청나라로 가져가 현지 문인들의 감상평을 받았다. 어딘지 어설퍼 보이는 소나무, 측백나무와 집 한 채를 거칠게 그려낸 세한도는 ‘조선 최고의 문인화’로 꼽힌다.
극한의 상황에 놓인 예술가는 어떻게 최고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을까. 수많은 문인화 중에서도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림 자체도 훌륭하지만 그것 안에서 공명하는 고난과 우정, 정신, 그리고 그것을 알아본 당대의 뛰어난 안목이 어우러져 세한도의 가치를 높인다.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송백이 더디 시듦을 알 수 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
공자의 말을 빌린 이 글에서 따온 그림의 제목은 처량한 신세의 자신을 끝까지 보살핀 이상적의 올곧음에 대한 상찬이었다. 역관인 이상적이 청나라를 드나들며 모은 거질의 책을 보내고, 최신 정보를 알려 준 것에 특히 고마워한 그는 이렇게 적었다.
“지금 세상은 온통 권세와 이득을 좇는 풍조가 휩쓸고 있다.…그대의 이끗(재물의 이익이 되는 실마리)을 보살펴 줄 사람에게 주지 않고 바다 멀리 초췌하게 시들어 있는 사람에게 보내면서 마치 권세와 익을 좇는 사람처럼 하였다.”
이상적은 그림을 청나라로 가져가 그곳 문인들의 감상평을 받았다. 1845년 1월 13일, 모임이 열렸고, 날짜를 달리하며 16명이 글을 적었다. 그들은 세한도에 담긴 뜻에 공감했고, “김정희가 겪는 정치적 난관을 안타까워하거나 이상적 개인의 행동을 칭송하기보다는 절의를 지키는 일의 어려움과 중요성”을 글에 담았다.
“…한 폭의 그림은 분명히 좌우명이로구나/오늘 그림을 펼치고 곧잘 떠오르는 건 옛사람의 마음 닮은 고상한 이의 지조/눈과 서리 겪을수록 더욱 푸르거니 이러한 절조 누가 가질 수 있을까?/…”(오순소)
박물관 오다연 학예연구사는 “중국 문인 여러 명이 한자리에서 감상하고, 시간을 들여 평가를 적은 것은 세한도가 유일할 것”이라며 “이상적의 변치 않는 마음에 대한 고마움을 김정희가 정성을 들여 표현하고, 그것에 공명한 청나라 문인들의 글까지 더해져 세한도를 명작으로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1848년 김정희가 위리안치에서 풀렸다. 서울에서 제자를 가르치며 조용히 살았으나 다시 한번 북청으로 유배되는 신세가 됐다. 불이선란도는 북청 유배까지 끝낸 말년의 김정희가 내놓은 또 다른 명작이다. 이번 전시회의 끝자락을 채운 난초 그림이다. 20년 만에 그려낸 난초 그림이었지만 김정희는 “하나만 있지 둘은 있을 수 없다”고 크게 만족했다. 난초를 시각적으로 재현하기보다는 서예의 방식으로 풀어낸 이 작품은 세한도와 맥을 같이하는 학예일치의 정점을 보여준다. 오다연 연구사는 “거의 동등한 비중의 그림과 글씨로 화면을 채웠다”며 “김정희가 지향하던 이상적인 난초 그림의 경지를 실현한 작품이다. 말년 김정희의 인품과 그림의 품격에 맞닿아 있다”고 평가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