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다자주의를 함께 견지하고, 자유무역을 수호해야 한다.”
왕이(王毅)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은 지난 26일 한·중 외교장관회담을 마친 뒤 기자들을 만나 ‘당신의 한국 방문이 미·중 경쟁과 관련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질문에 즉답은 피했지만, 왕 위원이 이번 방한에서 가는 곳마다 강조한 중국의 ‘다자주의’가 사실상 미국을 견제하는 측면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준 답이다.
특히 왕 위원은 이번 방한에서 중국이 강점을 가진 경제 분야 다자질서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외교장관회담 주요 의제였던 경제 분야 협력 강화 부문만 봐도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2단계 협상, 한·중·일 FTA 협상 등을 두루 다뤘다. 이는 모두 최근 서명된 중국 중심의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질서를 뒷받침하기 위해 주변국들과 촘촘한 협력망을 만드는 것이라는 분석이다. 특히 미국의 동아시아 핵심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과의 경제 협력 강화를 통해 한·미·일 공조의 틈을 파고드는 전략도 숨어 있다.
또 중국 외교부 보도문에 따르면 왕 위원은 이번 방한에서 강 장관에게 사실상의 반(反)화웨이 전선인 미국의 클린 네트워크에 대항하는 데이터 안보 이니셔티브에 참여할 것을 요구했다. 이 또한 중국이 강조하는 다자주의를 데이터 안보 분야에서의 미·중 갈등의 방어막으로 쓴 것으로 볼 수 있다. 왕 위원은 지난 9월 데이터 안보 이니셔티브 구상을 발표하면서 ‘일방주의 반대’를 강조한 바 있다. 왕 위원은 또 이번 방한에서 북한 문제와 관련해서도 다자적 접근을 강조했다고 외교소식통이 전했다. 북·미 중심으로 협상이 이뤄지던 트럼프 행정부 시기와 달리 중국이 다소 개입 여지를 늘릴 것으로도 관측되는 대목이다.
◆바이든 ‘다자주의’와 공존 가능할까
왕 위원은 이 전 대표와의 만찬에서 다자주의를 강조하고, 미·중 갈등과 관련해서는 “중국 정책은 불충돌, 불대결”이라고 말했다고 참석자들이 전했다. 하지만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강조하는 미국의 다자주의 질서는 주로 민주주의 가치를 중심으로 하는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중국을 배제할 수밖에 없고, 중국은 이를 경계하기 위한 다자주의라는 점에서 공존 가능성엔 회의적인 목소리가 많다.
김한권 국립외교원 교수는 “(과거와는 달리) 최근 중국의 다자주의는 미·중 전략경쟁구도에 대응하고, 주변국들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측면이 크다”고 말했다. 박원곤 교수는 “미국은 민주주의 가치를 중심으로, 중국은 경제적 이익을 바탕으로 각자의 다자주의를 강조한다”고 지적했다.
홍주형 기자 jhh@segye.com